생명 !!! 일강정의 꿈

명수필 감상- 보리

相民 윤봉택 2013. 1. 6. 10:53

2013. 01. 06.

 

보리는 추울수록, 겨울이 더 깊어질수록

더 세게 밟아줘야만

뿌리가 더 튼튼해지고

알알이 여문다지요

 

저가 문학에 무한 동경하며

한참 기웃 거리던

1973년 그 시절

늘상 즐겨 낭송 하듯 보듬았던

한흑구 님의 대표 수필 "보리"를

소개합니다.

 

               보     리

 

                                                                                                                                    한흑구(1909~1979)

 

1.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 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논과 밭에는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 들인,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정성껏 묻어 놓았었다.

크고 작은 흙덩이를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 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땅속에 곱게 묻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묻히면, 싹이 나기 힘든다." 고 하는

옛 사람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 속에 묻었다.

이제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 지 오래고, 까마귀들이 날개를 자주 저어 깃을 찾아간다.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머릿속에 간직하며,

굳어진 허리를 펴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2. 부지런한 꿀벌과 개미들은 물론, 그 밖의 온갖 벌레들까지도 다 제 집으로 들어가고,

몇 마리 산새들만이 나지막하게 울고 있던 무덤가에는,

온 여름 동안 키만 자란 억새풀이 풀솜 같은 꽃만을 싸느란 하늘에 날리고 있다.

다 말라 붙은 갯가 밭둑 위에는, 앙상한 가시덤불 밑에,

늦게 핀 들국화들이 찬 서리를 맞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도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그 맑고 높던 하늘도 검푸른 구름을 지니어 찌푸리고 있는데,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 솔잎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모든 화초는 대지의 품안에 고이 잠들었을 때,

너, 보리만은 그 야무진 팔을 내뻗고,

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세차게 자라 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잃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꼼짝도 아니 하고 그 푸른 얼굴을 잃지 않고 자라 왔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다.

지금 어둡고 차디찬 눈 밑에서도,

너, 보리는 장미꽃 향내를 풍겨 오는 그윽한 유월의 훈풍과 노고지리 우짖는 새파란 하늘과,

산 밑을 훤히 비추어 주는 태양을 꿈꾸면서,

오로지 기다림과 희망 속에서 아무 말이 없이 참고 견디어 왔으며,

삼월의 맑은 하늘 아래 아직도 쌀쌀한 바람에 자라고 있다.

 

 

 3.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남향 언덕 위에 누른 잔디가 파아란 속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너, 보리는 논과 밭과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 누리를 뒤덮는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는 푸른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는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 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너의 푸른 얼굴들이 새날과 함께 빛 날 때에는,

노고지리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너의 머리 위에서 봄의 노래를 자지러지게 불러 대고,

너의 깊고 아늑한 품 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 놓는다.

 

 

 4. 어느덧 갯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이 그의 그늘을 시내 속에 깊게 드리우고,

나비들과 꿀벌들이 들과 산 위를 넘나들고,

뜰 안에 장미들이 그 무르익은 향기를 솜같이 부드러운 바람에 풍겨 보낼 때면,

너, 보리는 고요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했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 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장미의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비명(悲鳴)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머리를 숙이고 성자(聖者)인 양 기도를 드린다.

 

 

 5.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아름 덤썩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스르릉 너를 거둔다.

농부들은 너를 먹고 살고, 너는 또한 농부들과 함께 자란다.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6. 보리, 너는 항상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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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흑구(韓黑鷗, 1909∼1979) 수필가, 소설가, 영문학자. 본명은 세광(世光). 평양 출생.

                                             1935년 미국 템플 대학 신문학과 수료. 광복 후 월남하여 포항 수산대 교수를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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