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세르디카 유적

相民 윤봉택 2014. 2. 28. 00:55

2014. 02. 16(일)

 

세르디카 유적(Roman Settlement of Serdica)

 

일요일 오후

불가리아 소피아 중심에 있는

바나바시모스크(사원)을 답사한 다음

지면 보다 낮게 형성된

세르디카 유적(Roman Settlement of Serdica)을  살폈습니다. 

 

세르디카는 소피아의 옛 이름으로서

BC 7세기 경 트라키아의 세르디 부족이

이곳에 정착을 하면서 세르디카가 되었습니다.

이 성벽은 3세기경 로마인들이 이곳에 성벽을 건립한 것으로서

현재는 동문에 해당하는 성벽 2개와 탑이 남아 있는데

 

사실은 대통령 집무실과 총리공관을 연결하는

지하도 건설 도중에

이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시대의 건축은 크게 3단계로 구분을 합니다.

에트루스카 건축시대(Etruscan Architecture B.C750-300)제1기 로마 왕정시대(B.C753-509) 초보적 단계

전기 로마건축 시대(B.C300-27) 제2기 로마 공화정 시대(B.C509-27) 해외 진출 영토 확장(그리스 등)

후기 로마건축 시대(B.C 27-A.D365)제3기 로마 제정 시대(B.C27-A.D476) 황금시대

 

로마건축의 양식 특징은

에트루스칸의 조적술을 근거로 로마식 조적법을 발달시켰고

해외로 영토 확장하면서는 그리스 의장수법을 이어받은 융합 건축양식이,

그러나 무엇보다 로마의 건축에 혁명을 가져온 것은 콘크리트 발명이었습니다.

 

 지중연안이 화산지대였기 때문에  화산재와 자갈 모래,석회를 혼합하여

콘크리트를 만들었고,

양질의 흙을 이용하여 테라코타(벽돌)를 생산하였습니다.

 

또한 교차볼트와 반원통형 볼트를 사용함으로서

건축 규모가 콜롯세움 처럼 대형화가 되었습니다.

 

로마가 유럽을 제패하면서 한 시절 세계 최강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은

이처럼 시멘트의 발견이었습니다.

포촐리나pozzolana라고 하는 화산재와 석회를 배합하여

시멘트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로마인들은 고대부터 석회와 모래, 물을 혼합한 석회 몰탈을 사용하여 왔었는데,

그러나 이것은 건조가 되면서 쉽게 부서지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BC 2세기 경부터 베수비오화산 주변 포촐리라는 지역에서 채취한

화산회(포촐리나)를 석회와 혼합시켜 시멘트를 만들었고,

다시 이 시멘트를 모래와 자갈 등을 섞어 콘크리트를 생산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바위보다 더 단단한 성벽을 구축하였습니다.

 

이를 대형 건축물에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일대 건축물의 혁명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이를 이용하여 처음 지어진 건물이 고대 건묵물의 백미로 꼽히는

126년 경에 축조된 판테온신전입니다.

 

그러나, 세르디카유적에서는

지진에 대비하기 위해 통나무들을 밑에 놓아

건축했던 흔적들이 나타나기도 하여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이 지진 발생이 많았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지중해판 구조가 겹치는  곳이라

예로부터 지진이 많이

발생되었고,

지금도 터키에서 지중해 연안에는 크고 작은 지진이

쉼 없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의 2층 이상 건물에는

지진 발생 시 건물 붕괴를 우려하여

벽면에 사선으로 내부선을 연결하여서

지진에 대비하는 현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A 바나바시모스크사원.  B 세르디카 유적.  C 성 페트카 사마르드지스카 교회(Church Sveta Petka Samardzhiyska Church)

 D 성 게오르기교회(Sveti Georgi).  E 목욕탕 유적.

 F 바나바시모스트거리(골동품) G 성 소피아성당. H 알렉산더네프스키교회(Alexandar Nevski)

 

로마시대의 세르디카 유적입니다.

 

 지면 보다 3~5m 낮은 저지대에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이 축조될 3세기 경에는 이곳이 주변 지형과 비슷하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정부 건물 지하 연결통로를 만들던 중에 발견되었다는

 이 유적은 시방도 진행형입니다.

 

 지하 공간에는

 발굴하면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여 놓았고, 지상에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석편 하나 하나 마다 담겨 있는

 그 날의 이야기를 언제면 다 노래할 수 있을까요 

 

 시방도 발굴을 기다리며

 얼룩진 비닐에 포장된 이 시대의 자화상들을 언제면 훌 훌 털어낼 수가 있을까요

 

유적이 지하에 있어

좌우에는 이미 육교가 건설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19세기에 중요 유물들은 훼손된 듯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이 안내문을 세워 답사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기하지만,

 

 

 

 

발굴 위치에 따라 세부적인 안내문을 설치하여 놓았습니다.

 

다리 좌우에는 발굴 유물과 출초된 부위를 그대로 노출 시켜 박물관 개념으로 운영하고 있었구요.

 

 

이미 오래 전 도시계획에 의해 포장된 곳은 그대로 존치시켜 놓았습니다.

 

 발굴된 이곳 또한 무슨 보존 활용 계획이 있는지에 대하여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간이 피복 상태로 보아 보존계획이 수립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굴 현장을 살펴보면서

 당시 로마시대의 축조 벽돌과 석축양식을 단편적으로 나마 느낄 수가 있어서 참으로 좋았습니다.

 

 

이미 좌우 육교 가설 시에 대부분 파괴되어

중요한 당시 모습을 조명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석축 양식들이 남아 있어 살필 수가 있었음으로 자족하였습니다.

 

발굴 현장에는 직접 출입을 금하고 있고,

 

다리 건너 지하 건물에서는 발굴유적지를 관광자원으로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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