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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갈레리우스 궁전 - 1

세르비아

by 相民 윤봉택 2024. 3. 3.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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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2. 17.

 

감지그라드 로물리아나, 갈레리우스 궁전

(Gamzigrad-Romuliana, Palace of Galerius)

 

2월 16일 불가리아의 릴라수도원과 소피아 중심에 있는

유적을 살핀 다음, 저녁에 세르비아의 니슈에 도착하여

하루를 유한 다음

 

17일

아침 조반을 마치고 8시에 출발하여

10시 40분에

세르비아 동부지역 자예차르시Zajecar의 서쪽

감지그라드Gamzigrad에 있는

감지그라드 로물리아나, 갈레리우스 궁전

(Gamzigrad-Romuliana, Palace of Galerius)을 찾았습니다.

 

2007년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서

이곳은 우리 일행이

대한민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방문한 유적지입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사진 담을 욕심으로

먼저 출입문을 지나 살며시 유적지 안으로 들어 갔었네요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세르비아 국립박물관에 계시는

보라 디미트리제빅 Bora Dimitrijevic 박사님의 안내를 받았습니다.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억만리 한국에서 문화재청 문화재담당 공무원들이 방문한다고 하여

직접 오셔서 안내를 하여 주셨고,

 

비공개 구역까지 친절하게 안내하여 주셔서

참으로 소득이 많았습니다.

하여 궁전 사진을 1~2로 나누어 싣게 되었습니다.

 

세르비아에는 세계문화유산이 4개소입니다.

스타리 라스와 소포카니( Stari Ras and Sopocani : 1979)

코소보 중세 유적지 (Medieval Monuments in Kosovo : 2004)

스튜데니카 수도원 (Studenica Monastery : 1986)

갈레리우스 궁전 (Gamzigrad-Romuliana, Palace of Galerius : 2007)

 

 

세르비아 동부에 있는 갈레리우스(Galerius) 궁전은

후기 로마 시대의 요새화된 궁전입니다.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반에

로마 황제 카이우스 발레리우스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Caius Valerius Galerius Maximianus),(?-311)의

명령에 따라 건설되었습니다.

황제는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뛰어난 군 전략가로 출세하여

305에 즉위하여 311년 병사할 때 까지 재위하였는데,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황제로 유명합니다.   

 

당시에는 황제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펠릭스 로물리아나(Felix Romuliana)라고 하였는데,

이는 황제가 퇴임 후 모친과 함께 지내려고 건설된 궁전으로서, 

북서부에 있는 별궁에는,

바실리카, 사원, 목욕탕, 기념 단지, 테트라필론(Tetrapylon, 출입구가 4개 있는 건물)이 있는데, 대부분 파손되었습니다.

 

18세기 까지 이곳은 하나의 군사유적으로만 평가되다가,

목욕탕을 발굴할 때 황제의 두상과 황제의 모친 이름이 세겨진 석판 조각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황제의 궁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황제가 재임하던 당시의 로마는

사두정치 체제로서 황제가 20년을 통치한 뒤 왕위에서 물러날 때 퇴임을 축하하였고,

갈레리우스도 그의 사상적 아버지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이념을 따라

성벽으로 둘러싼 궁전을 지어 여생을 보낼 생각으로 이 궁전을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297년에 페르시아의 나르세스(Narses) 왕에게 승리한 뒤에야

 요새 궁전 건축에 전념할 수 있었고,

그가 카이사르 칭호를 받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양자로 상속자가 된 뒤

자신이 태어난 다키아 리펜시스(Dacia Ripensis, 오늘날의 세르비아 동부)에서 궁전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여, 그는 이곳 이름을 다키아 사람인 어머니의 이름 로물라를 따서 로물리아나 요새라고 지었습니다.

 

발굴 당시에 월계관과 함께 발견된 장식 창틀 조각에

둥글게 펠릭스 로물리아나라고 새겨져 있어서 이를 뒷받침 하였습니다.

건축은 요새의 내부 북서쪽에 있는 궁전과 작은 사원부터 건축되었습니다.

 

305년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가 죽은 뒤

부황제(Caesar)였던 갈레리우스는황제로 즉위하면서

로마제국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는데,

 

당시 이 요새가 너무 초라하게 보여서

그는 다시 새롭게 궁전공사를 설계하여 이미 세운 건물을 둘러싼 더 웅장한 요새를 짓기로 하여

남쪽에 주피터(Jupiter) 신에게 헌정하는 거대한 신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갈레리우스는 요새 궁전의 동쪽 언덕에 자신과 어머니의 묘지를 봉분 형태로 만들고

축성 기념비를 옆면에 세웠는데,

이 기념비는 자신을 신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신격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된 갈레리우스는 헤라클레스와 동일시되었고,

나중에 아우구스투스 지위에 오르고 나서는 유피테르와 동일시되었습니다.

 

통치자 신격화는 사두정치 체제의 특징이었는데,

신의 화신으로서 어머니에게 신들의 궁전을 선사하고 싶었던 갈레리우스는

신격화를 통해 로물라에게 신의 불멸성을 보장받고자 하였나 봅니다.

 

모든 건축물 건설에는 마케도니아 부대가 주요 역할을 했는데,

이 부대는 동부 전투에서는 갈레리우스를 위해 싸웠고

평화로울 때는 건설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311년에 황제가 병으로 죽은 뒤에는

조카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즉위하여서도, 궁전 공사는 계속 되었으나

더 이상의 왕실 의식은 없었고,

그리고 궁전과 여러 건물은 개조한 뒤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졌습니다.

 

5세기 말까지 궁전은 쇠퇴를 거듭하다가 기독교 바실리카로 개조되기도 하였는데,

당시 궁전 동쪽 면을 따라 중앙에 아트리움이 있었고 애프스(apse)가 있는 다른 건물이 생겼습니다.

 새 건물에는 세례반(洗禮盤)처럼 보이는 작은 대리석 연못이 딸려 있었고.

방어물이던 탑 몇 기는 새로운 거주민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공예품 가게로 바뀌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때 로물리아나 궁전은 당시 법원 관리가 거주하던 중요한 마을 공동체역할을 하다가,

5세기 중엽 훈족의 침입으로 화재를 당하게 되면서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5세기 중반에서 6세기에 로물리아나는 재건되었으나 이전의 화려함을 되찾지는 못했으며,

새로 지은 건물은 크기나 건축 방식에서 더 발전하지 못했고,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통치기에는 확장하면서 건축과 공간 구성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7세기 초에는 아바르인(Avars)과 슬라브족의 잦은 습격으로 이 유적지는 황폐화 되었고,

9세기 초가 되어서야 이 궁전에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이때 요새 동쪽에 중세의 작은 정착촌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황폐화되어 하나의 군사 요새로만 전해지다가,

근대에 들어서

세르비아의 대학 교수에 의해 발굴되면서

갈레리우스 궁전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비운의 궁전유적입니다.

 

 

 저가 직접 담아 보았는데 많이 흔들렸습니다.

 갈레리우스 궁전 동영상입니다.

 

 

갈레리우스 궁전으로 가던 중, 창밖으로 보이는 시골집 수돗간을 담았습니다.

 

 

 16일 저녁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170여km 서북쪽에 있는 세르비아

니슈 ①

에서 하루를 유한 다음

 17일 아침을 먹고나서 니슈 북쪽 100km 지점에 있는

ⓐ갈레리우스 궁전을

향하였습니다.

 

 

 Nis에서  Zajecar 까지는 E771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가다가, 자예차르시에서 왼쪽으로  E761번 도로를 타고

 진행하다가,  좌측 105번도로에서 1차선 도로로 진입하면 닿을 수가 있는데.. 

 105번 도로에서 로뮬리아나

Romuliana 안내표지판이 있는

입구에서 좌회전하여, 조금만 더 가면 유적지가 있습니다. 

 

 

너무나 외진 곳에 있어서

 유적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지가 않습니다. 1일 몇 십명 정도입니다.

 니슈에서 이곳까지는 100km 자동차로는 약 100분여가 소요됩니다.

 성곽 외부 규모는 남북 237m.  동서 205m이고, 별궁의 동서 길이 70m. 주피터신전 동서 15m. 남북 25m입니다.

 

 

 진입 동선에서 바라본 궁전 동쪽 외곽구역입니다.

 

 

 갈레리우스 궁전 입구입니다.

 벌판과 낮은 능선이 있는 요새가 아닌, 휴양형 궁전입니다.

 멀리 능선 위로 보이는 무덤 두개가 하나는 황제, 또 하나는 황제의 모친 능입니다.

 

 

 안내판, 처음 이 유적이 발견되었을 때는 그저 단순한 군사적 요새로만 여겼다고 합니다. 

 

 

 

 

 자료사진 ; http://www.muzejzajecar.org/

- 위의 Felix Romvliana라고 세겨진 조각과 아래의 갈레리우스 두상이 발굴되면서

    이곳이 요새가 아닌 갈레리우스 궁전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주차장 옆에 세워진 매표소입니다.

이 방면에 전문가가 아니면 거의 찾지 않는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2013년도 기준, 성수기에는 평일 30명 내외, 주말에는 1백명 정도 다녀가신다고 하는데.

 

 

이곳이

감지그라드 로물리아나, 갈레리우스 궁전(Gamzigrad-Romuliana, Palace of Galerius)입니다.안내판 좌우에는 이 유적이 세계문화유산 임을 알리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로고가 있습니다.

 

 

 주차장이 궁전 북쪽에 있고, 이 문은 현재 주 출입문으로 사용되는 '북문'입니다.

 

 

 북문 입구 좌우 주변 성곽 구조입니다.

 문 입구 좌우에 아치형 작은 공간을 두었는데. 서로 다른 문양의 테라코타로 마무리하였습니다. 

 

 

북쪽 성문은 홍예문으로 하였고, 좌우 홍예기석은 대리석과 일반 석재를 혼용하여

틈새 없이 정갈하게 두었고, 아치를 이루는 선단석은 편통석이 아닌 5겹으로 이뤄졌습니다.

 

 

 성문 왼쪽 아치형 소공간입니다.

 일반 가공석재를 놓은 시멘트 회반죽으로 접착을 시키고 나서 테라코타 벽돌을 쌓아 연속 처리하고 있는 데

 아치형 소공간의 아래 부분은 좌우의 테라코타 모형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성문 오른쪽 아치현 소공간 구조입니다.

 외쪽의 원형 문양과는 다르게 밋밋하게 벽돌을쌓았네요.

 

 

 

 

북문 입구로 들어가서 북쪽 방향 기준(이하 모두) 왼쪽 성곽 구조입니다.

성문 외곽과 내곽의 벽돌 쌓기 구조다 다릅니다.

성문 밖에는 정교하게 석재를 가공하여 벽돌과 가공석을 겹겹으로 쌓았으나,

내부 구조는 외부보다 면이 다소 거칠어 보입니다. 

 

 

성곽 내부 오른쪽 성벽면 부분, 아래쪽 대리석주가 보이는 곳은

 황제가 모친을 위해 건축한 궁전 내부의 별궁으로 현재 노출된 유구 가운데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갈레리우스 황제가 어머니 펠릭스 로물리아나(Felix Romuliana)를 위해 지은 별궁과 바실리카 유적입니다.

바실리카, 사원, 목욕탕, 기념 단지, 테트라필론(Tetrapylon, 출입구가 4개 있는 건물)이 있는데, 대부분 파손되었으나,

그래도 당시를 유추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유적의 동서 길이가 70여m에 이를 만큼 규모가 큽니다. 

 

 

 궁전 남문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멀리 보이는 능선 위에 봉분 2개가, 황제 자신과 모친의 것입니다.

 

 

 북문 방향 오른쪽 성곽 구조입니다.

 가운데 아치문 입구가 철문으로 잠겨져 외부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과거 신을 모셨던 곳으로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을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이곳을 관장하시는 국립박물관 보라 디미트리제빅 Bora Dimitrijevic 선생께서 유물 살피는 것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궁전 안내문입니다.

 

 

 좌측에 보이는 포장도로가 북문으로 연결되며,

 좌우측에 있는 성곽들이 당시 모습 그대로입니다.

 

 

 바닥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벽돌조 사각기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안내판에 도시된 그림처럼 특정 건물들이 있었던 장소인가 봅니다.

이곳에서 서기 3~4세기에 건조된 로마시대 유구에서 당초문양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포도줄기 문양을

만났습니다. 함께 동행한 영주시 송준태 선생은 이에 대하여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답사객들이 모형 만들기 체험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는데 ... 

 

 

 궁전의 모형도를 바라보시면 이국 나그네들에게 설명하여 주시는 보라 디미트리제빅 Bora Dimitrijevic 선생님

 

 

 2007년도, 세계유산등재인증서입니다.

 

 

 궁전 배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완만하게 경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궁전의 책임자이신  보라 디미트리제빅 Bora Dimitrijevic 선생입니다. 

 

 

 궁전 동북향에 있는 성곽 내부입니다.

 

 

 보라 디미트리제빅 Bora Dimitrijevic 선생의 명함입니다

 

 

 별궁 북쪽에서 바라본  별궁 중심입니다.

 

 

 바로 이 별궁에서  궁전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여러가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안내문에 게시된 사진과 같습니다. 

 

 

 

 

 황후의 좌우에 당초문양이보입니다. 

당초문(唐草紋)이라고 한 것은 본래 일본에서이며,

중국에서는 만초문(蔓草紋)이라하여 무늬와 무늬를 연결하거나 공간 구성할 때에

식물군의 줄기나 잎의 모형을 이용하여 형상화된 것을 말합니다.

 

당초문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그리스에서 완성되었다고 하는게 통설입니다.

이러한 당초무늬는 BC 3세기 경 알렉산더 대왕이 동진할 때에 동방에 전래가 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중국 등을 거쳐 6~7세기에 불교문화와 함께 전래되어집니다.

 

이처럼 당초무늬는 실크로드를 통하여 사원을 장식 또는 장엄하면서 급격하게 인도 중국 등으로 전파되었고,

당나라 때에는 각종 생활기구에, 송나라에서는 도자기에 인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나타나는 당초문양은 5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시작됩니다.

 

 

자료사진 : http://whc.unesco.org/en/documents/122721

사진에 자료들이 바로 이 별궁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표범을 앉고 선 저 로마의 인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저 당초문만이 오롯이 알고 있지않았을까 

 

자료사진 : http://whc.unesco.org/en/documents/122721

 2000~2012년도 조사 시에 확인된 채색입니다.

 

 

자료사진 : http://whc.unesco.org/en/documents/122721

 우리가 방문하였을 때는 모두 뒤 덮혀 있어 살피지 못함에 못내 아쉬웠습니다.

 

 

자료사진 : http://whc.unesco.org/en/documents/122721

 언제 다시 인연이 된다면, 살펴 볼 수가 있을지

 

 

자료사진 : http://whc.unesco.org/en/documents/122721

아쉬고 또 아쉬운 이야기들

 

 

 바로 왼쪽 아래에는 저렇게 문양을 바닥들이 담겨 있는데

 아쉬워라 이를 우쨔 

 

 

 하나 하나 살피려니, 시간이 넘 아쉬네요.

 

 

 바로 이 아래에는 채색 찬연한 그리움들이 묻혀 있습니다.

 이 둥구런 용기는 모조품입니다.

 대신, 좌대는 진품이구요.

 

 

 겹겹이 둘러 있는 곳마다, 전설이 피어나네요.

 만약 로마시대에 포촐라나라는 시멘트를 개발하지 못했다면, 오늘날 로마유적은 그 흔적 조차 없었겠지요

 

 

 로마의 황금기와 함께 했던, 화산재와 석회를 이용한 시멘트 개발로 콘크리트를 생산하면서

 테라코타를 이용한 요새화된 성곽 축조

 

 

 또한 다양한 칼라의 석재 생산으로 미적 완성도를 높여나간 다양한 축조 기법들 

 

 

 방 마다  기능을 달리 하도록 설계되어진 별궁이 이러하였는데,

 하물며 본궁은 어떠하였을까.

 시방도 발굴을 기다리며 하늘을 열어오시는 세르비아의 그리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시고, 친절한 안내까지 하여주신

 영원한 우리 친구, 보라 디미트리제빅 Bora Dimitrijevic 선생입니다

 

 

 혼을 불사를 듯한 정열적인 열정의  

Bora Dimitrijevic 선생

 

 

 전 한켠에 보호되고 있는 것은

 작은 우물이었습니다. 이로 보아 이곳은 부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물의 원형통은 세계적인 동질성을 갖고 있나 봅니다.

 

 

 당시 이 우물을 깃던 아낙은 어느 곳에 머물며 혼바람을 날리고 계실까.

 

 

 왼편 또한 바닥에 채색으로 장식된 공간이었습니다.

 

 

별궁의 갖은 석재들

 

 

 모두가 한결 같이 다른 빛을 보이며,

 천년의 그리움을 한올 한올 날리고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나서면

 그 날에 두고 온 이야기를 만날 수가 있을지 몰라

 

 

 남문 성곽입니다.

 남문측의 동서 길이는 205m 로서 그 중심에 남문을 두었습니다.

 

 

 주피터 신전입니다.

 

 

 문화재청 김홍동 서기관님과 세르비아의 국립박물관 책임자이신 보라 디미트리제빅 Bora Dimitrijevic 박사님

 Bora 선생은 우리 일행이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이 유적을 답사한 손님들이라면서 크게 환대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저 북문을 나서면

 다시 이곳에 언제 답사할 수가 있을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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