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보스니아 소콜로비차다리

相民 윤봉택 2024. 3. 3. 18:23

2014. 02. 18.

 

 

 

메흐 메드 파사 소콜로비차 다리 Mehmed Paša Sokolović Bridge

2007. 6. 28일 유네스코 뉴질랜드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드리나강의 다리"로 더 유명합니다.

 

2월 17일 저녁

세르비아에서 하루를 유한 다음

아침 7시 40분에 보스니아 비세그라드의 소콜로비차다리를 살피기 위해 출발을 하였습니다.

 

08시 23분

보스니아 국경에 도착, 이미 많은 차량들이 먼저 도차갛여 국경 검문소에서 검색을 받고 있었지만

우리 일행은 대한민국임이 확인되자

바로 통과를 시켜 주었습니다.

 

09시 20분 비세그라드에 도착하여 시내를 통과 소콜로비치다리에 도착하여서는

1시간 20분 동안 다리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비셰그라드 Višegrad는 행정구역 상 보스니아의 스릅스카 공화국에 속하며

해발 높이는 389m, 인구는 3만정도의 작은 도시로서,

드리나 강과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세르비아와 마주합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단일국가이면서도

보스니아와 크로아니타인이 51%

세르비아인 49%인 스릅스카 공화국

그리고 두 인종이 관리하는 브르치코 행정구가 존재하는 등 

인종과 영토 분쟁이 상존하는 화약고나 다름없는 지역이어서 그런지

분명 보스니아이지만

세르비아 국기가 게양된 마을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운명의

소콜로비차 다리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96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이보 안드리치(1892-1975)의 소설

『드리나강의 다리』의 배경이 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1992년 보스니아 전쟁 때는

유고슬라비아 군대의 공격으로 인해

보스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마을이 파괴되었으며

이곳 다리에서도

많은 보스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 군대에 의해 학살당했던 마음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소설 드리나강의 다리』로 더 잘 알려진 소콜로비차다리,

인종 간, 종교 간의 충돌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발칸 반도의 보스니아에서 태어난

이보 안드리치가 자신의 조국의 역사를 인간의 운명과 역사에 관한 위대한 대서사시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드리나 강의 다리』는 터키 제국 시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400여 년 동안 보스니아의 소도시 비셰그라드에 놓인 다리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문화 종교의 공존과 충돌의 역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의 흐름 속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동쪽을 지나가는

드리나 강(Drina River)을 가로지르는 소콜로비차 다리는

16세기 말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을 당시,

궁정 건축가인 미마르 코카 시난(Mimar Koca Sinan)이

메흐메드 파사 소콜로비차(Mehmed Pasa Sokolovic) 수상의 명을 받아

1571년부터 1577년까지 7년 공정 끝에 건설되었습니다.

 

이 다리의 특징은

오스만 제국의 기념비적 건축과 토목 공학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11~15m간격으로 11개의 석조 아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강의 왼쪽 제방으로 갈 수 있도록 오른쪽 아치 부분에는 4개의 램프가 설치되어 있어

강의 좌측 제방으로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총 길이179.5m의 이 다리는 고전적 오스만 시기의 위대한 건축가이자 기술자였던 시난의 대표작이며,

동시대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와 비견될 만한 작품으로 평가되어 지고 있고,

또한 유적의 우아한 비율과 기념비적인 고급스러움은 당시 건축 양식의 특별한 위대함을 보여 주고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다리를 가로지르는 드리나 강은 발칸 지역의 산악 지대로부터 물을 끌어서

사바 강(Sava Rivers)과 다뉴브 강(Danube Rivers)으로 흘러갑니다.

홍수에 취약했던 이 다리의 난간은 여러 차례 붕괴 위험을 맞습니다만 그 때마다 복구가 이뤄졌습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이 다리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통치 시대 중에서도 오랜 기간 동안 집권했던

 메흐메드 파사 소콜로비차 수상(1505~1579)에 의해 건설되었고

중요한 것은 그의 고향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다리는 이스탄불에서 온 오스만 제국에 의해 내부 발칸 지역의 계획과 통제라는 점에서

중요한 유통 검점지역이 되었는데

이곳의 발전으로 인해 다뉴브 평야를 사라예보와 아드리아 해,

특히 라구사(두브로브니크)의 자유 항구를 잇는 루트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다리는 주로 홍수 때 자주 훼손 되어 1625년과 1875년에 복구가 이뤄집니다.

이후 1898년 큰 홍수로 인해 이 다리 전체가 잠겨 교각이 흔들거리고

 난간이 떠내려가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전체적으로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때문에 1911~1912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기술자들에 의해

 교각(교각 4, 5, 6, 7, 8과 9)을 보강하면서 두꺼운 석재 난간을 새로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1914~15) 동안에는 교각 3과 4가 다이너마이트로 인해 폭파되었고,

전쟁 후에 원래 다리에서 남아 있는 부분을 지탱하고 있던 강철 대들보를 임시적으로 보수했습니다.

1939~40년에는 원래 디자인을 따라 석재로 재건축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3년에는 5개의 다리 아치가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이로 인해 교각 3, 4, 5와 6번 교각이 붕괴 위협을 받게되자

1949~52년에는 다리 아래로 함몰된 당시 석재를 그대로 발굴하여 재건축되었습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보수와 복구를 한 덕택에 여러 차례의 큰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 원래의 모습은 대체로 유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왼쪽 제방에 있는 진입 경사로는 1991년에 복구가 되었고,

2003년 부터는 다리의 안전을 위해 차량 통행이 전면 금지되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강의 특성과 강의 수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수력발전소가 강 상류에

두 개(보스니아, 세르비아)나 있어 여전히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일행은 소콜로비치다리를 살핀 다음 다시

사라예보를 향해 .......

 

 

보스니아의 비세그라드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소콜로비차다리입니다.

 동영상 촬영이 미숙하여, 마음이 흔들리니 영상도 따라 흔들거리네요

 

 

 보스니아에 들어서니  이색적인 지붕들이 눈에 나타나네요.

 너와 집 처럼 판자로 된 지붕과 스레트로 덮힌 지붕구조들 

 

 

  2월 15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1.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유한 후 릴라 수도원 등을.   2. 세르비아의  니슈에서 16일 밤을 넘기고.  

  3. 갈릴레우스 궁전을,   4.파라친 Paracin 에서 점심을.   

  5. 세르비아의 우지체Uzice의 즐라타보르Zlatibor에서 17일 밤을 넘기고 나서

.

6 보스니아의 비세그라드의 소콜로비치다리에 이르렀습니다.

 

 

 6. 비세그라드의 소콜로비차다리를 답사한 다음

 7. 보스니아의 수도 세르비아로 이동을 하게 됩니다.

 

 

 여행길 창 밖 풍경,

 목장이나 울타리마다 겨울에 양 먹이용으로 건초를

 낟가리하여 놓았습니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국경지대의 안내소의  풍경

 지금은 사용되지 않은 .....

 

 

 보스니아로 가는 길에서 만난 농가 지붕,

 강원도의 너와 비슷하게, 나무판을 이용하여 지붕을 덮고 있습니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국경 검문소에서 보스니아 입국을 기다리고 있는

 창 밖 미니 관광철도 예매소입니다.

 

 

 세르비아에서 보스니아로 가기 위해 보스니아의 국경 검문소에서

 여권 검사 대기중 창 밖 세상이네요

 

 

 날씨는 제주 서귀포와 비슷하였는데

 바람이 없어서 체감 온도는 높은 편이었구요.

 이렇게 시골에는 양봉을 하는 양봉축산농가들이 많았습니다.

 양봉 상자를 보니, 이동식이 아니라 고정식으로 하여 계상하고 있었습니다.

 

 

 왼쪽은 자동차 도로이구요

 오른쪽은 관광열차 전용 철로입니다.

 

 

 드디어,

 소콜로비차 다리가 있는 비세그라드에 입성하였습니다.

 

 

 중심도로인데도 2차선, 시내권역 배부에 있어

 주행 불편하였으나, 기사님이 척척이네요.

 

 

 드리나강 다리 안내판이 보이고

 

 

 2003년도 소콜로비차 다리가 차량 통행이 통제되면서 부터

 대체로 건설된 다리가 저 멀리로 보이네요. 

 

 

 2007년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소콜로비차다리입니다.

 1571년부터 1577년까지 7년 동안 공정을 거쳐 완성된 대리석 다리입니다.

 

 

 전체 길이 179.9m, 너비 4m, 교각 아치가 11개소입니다.

 

 

 여러 차례 강물이 범람(1625, 1875, 1898년)하였지만 그때마다 복구가 이뤄지면서

 위기를 넘기곤 하였지만,

 

 

1911~191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기술자들에 의해

 교각(교각 4, 5, 6, 7, 8과 9)을 보강하면서 두꺼운 석재 난간을 새로 설치하였습니다.

 

 

 다리 동쪽입구입니다.

 주변에는 다리 안내소가 있었으나, 금일은 휴일인지 문이 닫혀 있었구요.

 

 

 다리 동쪽 주차장 맞은 편 우측에 세워 놓은 안내판입니다.

 

 

 그 안내판 곁에 소설 『드리나강의 다리』의 저자 이보 안드리치(1892-1975)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소공원

 안드리치는 이 소설로 196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이로 인하여 이 다리는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소설 『드리나강의 다리』의 저자 이보 안드리치 Ivo Andrić(1892-1975)의 흉상입니다.

 

 

 다리 아치교각 동쪽에서 5번까지는 교각 하단축에

 작은 아치공간을 두개씩 두었고, 나머지 다리 중심에서 서쪽 교각 6개는 그대로 마감을 하였고,

 반대편은 전체 교각마다 아치형 공간을 두었는데,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교각 하단 지대석위에 놓여진 기석을 삼각형으로 마감하면서

 꼭지점 마다에는 인물상, 또는 각종 종교적 형상을 세겨 넣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보스니아 비세그라드의 노인(?)입니다.

 그 분의 표정에서 드리나강의 다리에 얽혀 있는 숱한 역사의 현장들이

 시방도, 강물로 흐르지 못하고 남아 있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작은 대리석을 이용 가공하여 포장하여 놓았는데

 도시 대부분이 이렇게 포장되어 있어 참 편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다리 중심에 교대를 세워

 1571년에 다리가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2차 셰계대전(1943)에 파괴된 것을

 1949~1952년 까지 물에 잠긴 석재들을 모두 끄집어 내어서 복구하였다는 기록이 판석에 새겨 있네요.

 

 

 다리가 끝나는 지점 좌우에는 이렇게 노면 난간 하대에 귓돌을 두어

 차량 운행시 난간이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는 턱을 만들어 놓았구요.

 

 

 다시 서쪽에 세워진 다리 안내문입니다.

 

 

 다리 서쪽 낮은 언덕에 올라

 바라본 드리나강의 다리 전경입니다.

 

 

 강믈 중심으로 좌우에는 도시가 형성되어 있구요

 

 

 다리 서쪽 강변에는 서쪽에서 유입하는 우수를 위해

 작은 아치 하나를 별도로 세웠는데,

 경운기 한대가 지나가네요, 대충 짐작으로는 7마력 내외인 듯 합니다.

 

 

 

 

 다리 동쪽 강변 석축 구조입니다.

 강물이 아래로 흘러가기에 그렇겠지만,

 강변에는 저처럼 작은 보트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구요.

 

 

 다리 동쪽 도로변 상단 80여m 지점에

 세계문화유산인 이 다리 홍보와 안내를 겸한 안내소가 있었는데

 

 

 문이 잠겨 있어서 살펴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내부에는 여러 종류의 안내 홍보지가 있었고,

 준비 판매되는 기념품들도 있었습니다.

 

 

 아쉽지만, 창문 틈새이로 내부 모습을 담을 수 밖에요.

 

 

 이렇게 이 도시는 따뜻합니다.

 겨울에도 이렇게 채소를 직접 따서 싱싱하게 먹을 수 있으니까요

 

 

 드리나강의 다리 작가 이보 안드리치(1892-1975)를 기념하여 세운 소공원

 바로 다리가 보이는 동쪽 좌측 공간에 조성하여 놓았습니다.

 보스니아의 작은 마을 트라브니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외교관 생활까지 하면서

 1961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1992년 인종 대학살로 알려진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에서

 많은 보스니아 국민들이 이웃 세르비아 군인들에게 무참하게 이곳에서 학살되었고,

 당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과 시방도 시신조차 찾지 못하는 영혼들을 위로하는

 전단을 만들어 나무에 걸어 놓고 추모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처럼

 따스한 햇살이 보스니아에 나리고 나리어서 모든 역사의 고뇌들이

 드리나강물결에 실어 보내고, 아름다운 평화가 겨울을 이겨낸 푸르름처럼

 발칸반도 마을마다 인류애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길 두 손 모우면서

 

제1차세계대전의 발원지 사라예보로 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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