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절/부자율은 구전에 이 지역에 묘를 쓰면 재운이 따른다고 하며, 현재 강씨 집안 선묘가 있다.
앙애골
주변에 양하가 많이 있어 불려진 지명으로 '앙애'는 양하의 제주어이다. 신산리 7372번지 주변
심방터 / 심방가름
심방이 살았던 동네라 불려진 지명으로 난산리 264번지 일원이다.
난산리/ 새모슬/난초들/난야리/난뫼/난미
5km 지점
난산리
난산 국제모루 / 포제단
본래 이 언덕에 마을 포제를 지내던 단이 있었다고 한다. 한 고승이 마을에 와서 지세가 판 국(局) 형국이니, 소를 희생하여 제사를 지낸 다음 포제 명칭을 국제局祭라고 하면, 마을이 크게 번성한다고 하여 불려진 지명으로,난산리 1149번지 일원이다.
서당골 입구
마을 서쪽에 신당이 있어 불려진 지명으로, 난산리 1167번지 일대
서당 신목(팽나무)
서당
마을 서쪽에 있어 불려진 당 이름이다.
성산읍 난산로41번길 39-7/ 서북쪽 도로 옆 팽나무가 신목이다.
난산리 올레 정인필 삼춘
호적나이는 75세이지만 실지는 77세(1945년 을유생)이시다. 서당골에 대하여 말씀 주셨다.
22살 꽃 다운 나이에 친정 가시리에서, 하늘 낭군님 따라 난산리로 시집 오신 올레 삼춘, 얼마 전 관절 수술하셨다고 하셨다. 속히 쾌유되시길 합장드린다.
난산리 가옥
사당골 서당 초입에 있는 가옥이다. 성산읍 난산로41번길 39-6
안거리와 모커리
밖거리
난산리 가옥
사당골 서당 초입에 있는 가옥이다. 성산읍 난산로41번길 39-6
면회모루 / 면의모루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마을을 책임지는 풍헌(리장)을 이 모루에서 선출하였고, 이곳에서 회의가 이뤄져 불려진 지명으로 난산리 1196번지 동산
설겡이머물
돌과 가시 덤불러 얼기 설기 얽혀 이뤄진 동산이라 불려진 지명, 난산리 1400번지 일원
난산리 가옥
1970년대 전후하여 지어진 가옥 건축 구조 돌집
성산읍 난산로41번길 66-1
김응숙 삼춘 난산리에서 8대의 삶을 지켜오시는 병자생 87세 어르신(난산리 1344-1)
마을 지명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주셨다(2022. 2. 3)
꽝머드니
과거에 주민들이 식용으로 도축한 가축의 뼈를 이곳에 모아 두어 묻었고 하여 불려진 지명으로 난산리 1341번지 일원
통오름
신산리와 난산리로 오름이 나눠져 있는데, 밧담이 정겹습니다.
토질이 다른 곳과는 달리 황토색으로 좋습니다.
영산이골
통오름 올레 초입 북쪽 능선에 있는데 난산리 2001번지 일원이다.
전설
오래 전 오조리 강씨 집안에 영리하고 총명한 영산이라는 하인이 있었는데, 그가 모시던 강씨 집안 인세공이라는 분이 세상을 떠나자, 영산이는 상주에게 좋은 묘 터가 있음을 알려주니, 상주는 그곳에 묘를 쓰려고 하자, 하인 영산이는 상주에게 말했습니다. 상전을 모시게 되면 자신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면서 만약 나의 죽음을 면하게 하려 주시려면, 저가 독 안에 들어가 있어야만 합니다. 장례가 끝나면 독 두껑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나서 영산이는 개광을 하다 보니 밑에 판석이 나올 터이니, 그 위에 다가 부디 장사를 지내시면 되겠습니다 하고 나서 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과연 터를 파니 판석이 나왔는데 상주는 선친을 판석 위에 모실 수 없다면서 판석을 열어 세우니, 그곳에서 왕벌이 나와 독 주위를 계속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영산이는 시간 지나도 독 두껑을 열어 주지 않자 스스로 두껑을 여니 왕벌이 바로 영산이 이마를 쏘았고 이에 영산이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상주는 선친 무덤 옆에 영산이를 안장하였는데 지금도 강씨 문중에서는 이 무덤을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통오름 올라 가는 올레
통오름 올레
모구리오름. 유건애오름 군락
산담 방쉬
안장을 하면 제주에서는 산담을 쌓아 우마의 출입을 방지하고, 산불에 타지 않도록 하고, 신이 제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신문(神門)을 만들어 놓는데, 산담을 할때 지형 지세가 허한 곳을 보호하기 위해 이렇게 허한 곳을 막는 담을 더 쌓습니다. 신문(神門)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묘제로 전환하게 되면 닫게 됩니다.
신문의 위치는 가문에 따라 다르지면, 보편적으로 볼때, 남자는 좌측, 여자는 우측으로 만듭니다.
가끔 전면으로 만든곳도 보게 되는데, 용눈이오름 근처에 가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산담 북동 각담을 높여서 허한 곳을 보완하였네요
당시에는 이렇게 나무가 무성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통오름에서 독자봉
통오름은 멀리서 보면 하나로 보이지만
크고 작은 봉우리가 다섯개나 되는 넓은 오름입니다.
7km 지점
통로름에서 순방향 내려서는 올레 계단
통로음 계단에서 독자봉
통오름과 독자봉 거리
독자봉 저슬굴 주변
미 확인, 신산리 1713-1번지
독자봉 가는 올레
독자봉에서 통오름
독자봉 전망대
독자봉수 터
독자봉수
이 봉수의 특징은 석축이 아니라, 오름 형태 그대로 활용하면서 둔덕을 높여 사용하였다.
북동으로는 수산봉수, 서쪽으로는 신풍리 남산봉수와 교신하였다.
독자봉 내려서는 올레
독자봉 올레
9km 지점
독자봉 아래 차 밭 입구
이쁘게 고사리
돌아서면 다시 독자봉
통오름 알
삼달리에서는 독자봉을 통오름이라 부른다. 신산리 1827-3번지 일대
오생이 / 오송이
주변 지형이 지네처럼 생겨서 불려진 지명으로, 삼달리 850번지 주변 일대이다.
하늘레기
하늘 나라에는 없는 지상의 하늘레기
오송이
삼달리 847번지 일원
오이밭 허수아비
삼달리 325번지 주변
소뭇기연못 공원
소뭇기연못
삼달리 353-2번지에 있다.
강덕부 선생
하천리 출신으로 성산읍 향토사에 대하여 매우 박학다식하신 분이셨다.
올레를 걷다가 소뭇기연못에 대하여 여쭸다.
11km 지점 '접시왓'
삼달리 382번지 일대 지경
'골진밧' 삼달1리 411번지 지역 입구
강성익 헌수단 강성익獻壽壇
1800년 정조 24년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이곳에 단을 세우고 만수를 축원하였던 곳이다.
풀이 너무 짙어 들어 갈 수가 없었다. 나중에 신발을 바꾸어 준비하고 다시 찾아 보고자 한다.
제주올레 김영갑 갤러리로 방향 잡기 전, 반대 방향으로 50m 서북쪽 도로변에 있는데. 삼달리 451-1번지이다.
진 지평 강성익은 정조24년(1800)윤4월26일 흉년에 대한 대책과 각종 폐단 척결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에 대하여 정조는 상소대로 처리하도록 윤허하니, 전 지평은 낙향 후 성은을 기리고자 주상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단을 설치하고 조석으로 북향배례하였다고 전한다.
헌수단 표석 후면(2022. 02. 03 순례 자료 보완)
(聖恩如天 圖報無地 謹以設壇 拜獻萬壽)
성상께서 내려주신 성은 하늘과 같아
이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나 달리 보답할 곳이 없습니다.
이에 삼가 헌수단을 세워
성상께 만세의 수를 드리옵니다.
上之卽位五年甲子四月三日 微臣 康聖翊
순조 즉위 하신지 5년차/1804(1800년 7월 즉위하니 甲子까지 하면 5년이 됨)
갑자년 4월 3일 미천한 신하 강성익
삼달1리
삼달1리 석조 가옥 삼달로 155
석조 가옥
김영갑 갤러리
김영갑 선생과의 인연은 2002년인 것 같다. 김창부 선생의 주도로 한라식물사랑회가 결성되고 나서 다 같이 식물답사하면서, 현재 박훈일 관장의 아버님이 운영하시는 번영로 길 섶에 있는 작업장을 방문하였고, 그 집 한쪽에서 사진 작업하는 김영갑 선생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나서 2004년도인가 현재 갤러리로 조성된 삼달초등교를 전시실로 꾸미신다면서 운동장에 많은 돌을 실어다 놓고 인부들과 함께 돌담 쌓기 작업 하는 작업 현장을 찾아 애기를 나누었고, 영면하시기 전 발간한 저서 축하를 위해 방문한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인증샷을 하여야 하기에 박훈일 관장을 만나고 가려고 갤러리 매표소에서 매표를 하려 하니, 도민은 3,500원이란다. 신분증을 제시하니,
오잉 66세라서 경노 우대로 1,500원이란다.
뜨악 66세 되면서 첫 혜택을 받은거다.
대한민국 경노만세, 대한민국 노인수수만세 만만세
13시 도착
김영갑 갤러리 입구
삼달1리 물진밧
주변 지형으로 인하여 비만 오면 물이 풍성하여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수리공사가 완벽해서이다.
삼달리 대기내가 완벽하게 정비되어 이제는 물진밧도 옛말이 되었다.
2014~16년까지 완벽하게 수리시설을 잘 정비하였다.
신풍교차로
여기서 제주올레 3-A.B코스 함께 걷는 신풍교차로 까지는 5분거리다.
신풍리 / 웃내끼 / 상천미
본시 신풍, 신천, 하천리 세 마을 명칭은 '내끼'였다. 여기서 '끼'는 마지막, 끄트머리라는 의미이다.
조선 중기에 도내에서는 토족土族과 향족鄕族의 구분을 두면서, 향족은 위로, 토족은 아랫마을에 살면서
'내끼' 지역인 경우에는 윗마을을 '웃내끼/상천미 상천미上川尾', 아랫마을을 '알내끼/하천미下川尾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1840년대 이 마을 오진우라는 분에 의하여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의미로 신풍리新豐里라 마을 명칭을 달리하여 부르게 되었다.
↗신풍포구 입구
↗신풍포구 3-A.B거린올레 Y형 갈림길
↗신풍포구 합류지점에 14시 37분 도착
↗신풍포구/큰개/대포
↗신풍포구/큰개/대포
↗먹돌캐 / 동진여
해안 주변이 모두 먹돌로 이뤄져 있어 불려진 지명으로 신풍리 18번지 해안이다.
이하 하천리 소금막 까지 자료는 제주올레 3-B 코스 자료를 옮겨왔습니다.
이곳 해안가 목장은 신풍리와 신천리목장으로 나눠진다
신풍목장 공주와 신천목장 공주의 미소
↗먹돌캐 / 동진여
신풍포구 방향 해안선
제주올레 3-A코스 15km 지점
제주올레 3-B코스 8.6km 지점
여기에서 신풍리, 신천리목장이 나눠지는 경계선이기도 하다.
용머리/용궁올레/칼선도리
용머리는 주변 바위가 용의 머리처럼 모습을 하고 있어서
용궁올레는 주변 수심이 매우 깊어 용궁으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로
칼선도리는 주변 바위가 칼날 처럼 날서게 서 있어서 불려진 지명이다.
고망난돌/용궁올레
전설(신풍리)
용궁올레라고 하는 이 곳은 수심이 매우 깊어 엣부터 용궁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고 해서 좀녜가 물질을 기피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옛날 웃내끼(신풍리)에 물질 잘하는 상군 송씨가 혼자서 곧잘 이 용궁올레에서 물질을 하였는데, 하루는 엄청나게 큰 전복이 보여 그것을 따려고 빗창으로 찌르니, 그 순간 좀녜는 정신이 혼미하여 의식을 잃었고, 깨어나보니 강아지 한마리가 끙끙 거리며 따라오라는 듯이 앞장서자, 좀녜는 그 강아지를 따라 가는데, 마치 별천지와 같았다.
그 때 그곳 미모의 처녀가 어디셔 오셨냐고 물으니, 웃내끼에 사는 좀녜라고 하자, 이곳은 인간이 올 수 없는 남해용궁인바 용왕이 알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하자, 좀녜는 제발 살려달라 애원 하였고, 이에 처녀는 송씨에서 인간세상으로 가는올레를 열려 줄테니,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아니된다고 하였으나, 송씨는 밖으로 나오다가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보고 싶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맑았던 곳이 갑자기 암흑세계로 변하면서, 올레를 지키는 수문장이 나타나 누구냐며 잡아가려 하자, 좀녜는 그동안 있었던 사연을 얘기하며 인간 세상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사정을 하니, 처음 강아지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여 인간세상으로 나오게 되자, 바로 그 때 칼날처럼 바위들이 솟아나 용궁으로 가는 올레를 막아버렸고 이를 '칼선도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남해용궁 묘령의 아씨들
고망난돌
칼선도리(신풍리에서 부르는 지명)
선돌/칼도리(신천리에서 부르는 지명)
신천리고망난돌
센동산
- 칼선도리/칼도리/신천하목장
신천리 하동 바닷가 해변, 이 동산의 정기를 받아 힘쎈 사람이 나온다고 하여 불려진 지명
신천리 하목장/마장
신천리를 '샛내끼'라 부른다. 웃내끼(신풍리), 알내끼(하천리)라 부르다 천미천을 중심으로 '샛내끼(신천리)"라 부르고 있다.
신천리마장
이 목장은 이마을 출신 동암 오장헌(1849~1903) 선생과 연관이 깊다. 동암 오장헌은 부 오익효, 모 광산 김씨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를 성지, 호를 東庵(동암)이라 했다. 지금도 옛글을 하는 이들은 동암선생이라 높혀 부르고 오봉조, 오진조와 함께 오문 삼은일(吳門 三隱逸:오씨집안의 세사람의 숨어산 선비)의 한 사람이다. 많은 글을 지었으나 더러 일실되고 시집 2궐이 전하고 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아하고 도량이 넓어 다섯 살 때에 천자문을 읽어 웃어른들의 칭찬을 받았다. 자라서 의청선생에게 글을 배워 스무살 쯤 되어서는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고종 갑인년(1884)에 흉년이 들었을 때, 나라에 글을 올려 세금을 면제하고 구호곡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여 받아들여졌다. 향시가 있을 때마다 부시관으로 초청되었음을 보아 그의 학행을 짐작할 수 있다. 奉常寺別提(봉상사별제), 旌義縣監(정의현감)의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여 받지 아니하고 손수 나무하고 밭갈아 늙으신 부모님을 공양하여 평생 몸을 바르게 가졌다. 나라에서 벼슬을 사양하는 그에게 하목장의 넓은 땅을 하사하였다.그러나 청렴한 그는 자기가 아무런 공로가 없는데 은전을 받는 것은 옳치 못한 일이라 하여 주력 사양하여 받지 아니했다. 헌종15년(1849)에 낳고 광무 7년(1903)에 돌아 가셨다. (신천리 마을 자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