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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10코스

섬 바람, 섬 풍경

by 相民 윤봉택 2022. 6. 24.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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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9. 04.

 

제주올레 10코스

 

2022년 1월 6일 부터 제주의소리와 서귀포신문에

격로 제주올레 27코스 29개 노선에 대하여 연재를 합니다.

 

그 연재 중 열세 번째 10코스 내용을 이곳에 링크합니다. 

 

제주의소리  바당 올레의 문을 여는 제주올레 10코스 < 윤봉택의 탐나는 올레 < 매거진 < 기사본문 - 제주의소리 (jejusori.net)

 

바당 올레의 문을 여는 제주올레 10코스 - 제주의소리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한권의 인문학 서적을 읽는 재미와 닮았다. 역시 걷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 속도가 느리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니 삶의 속도를 늦추는 걷기야 말로 우리를

www.jejusori.net

 

서귀포신문 바당 올레의 문을 여는 제주올레 10코스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서귀포신문 (seogwipo.co.kr)

 

바당 올레의 문을 여는 제주올레 10코스 - 서귀포신문

언제 걸어도 무한 포옹을 느끼는 제주올레, 그 올레에 서면, 계절이 변할 때마다 절(파도) 소리가 다르다. 계절에 따라 바람 방향이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의 느낌이 다르기 때문일까. 걸음

www.seogwipo.co.kr

 

 

 기사 134110.pdf (seogwip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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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코스134110.pdf
3.98MB

지난 2021831

제주올레 전코스를 1차 완주하고 나서

 

94일 토요일부터, 2차 순례에 나섰습니다.

 

2차 순례 첫 코스는, 1차와 마찬가지로 제주올레 10코스입니다.

이유는 1이 아닌, 0이기 때문입니다.

0부터 시작하고 싶어서입니다.

 

제주올레 10코스 안내소 화순백사장에 오전 0915분 도착 걸었습니다.

 

이 10코스는 2021. 4. 29. 인증 코스로 처음 걸었던 코스였으며,

당시에는 10~13코스를 주마간산으로 걸었었기에 

이번 2차 순례에서 그 때 살피지 못하였던 문화 흔적을 살피면서 걷고자 합니다.  

 

주변에서 왜 다시 걷느냐고 하신다.

나에게 있어 올레는

나라는 울타리와 밖을 연결하는 첫 통로이다.

 

때문에 모든 것은 올레로 소통한다.

걷는 게 소통이고, 걷는 게 건강이다.

걸어질 때까지 놀멍 쉬멍 꼬닥꼬닥 걷고 싶다.

 

혼자 걸을 때는 자신만의 느낌으로

둘이 걸을 때는 공유하는 마음으로

여럿이 걸을 때는 고운 인연 감사함으로

 

이렇게 순례하면, 걸림이 없어 더 기쁘다.

1, 한 차례 걷는 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사실 나는 무릎 상태가 안 좋다.

3년 전 정형외과 진단 결과 퇴행성관절염이라고 하셨다.

왼쪽이 관절염 2단계, 오른쪽이 1.5단계

하여 6개월에 1회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처방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걷는다고는 의사님께 말씀 안 드렸다.

 

제주올레는 2021. 4. 29일 부터 대략 5~7일 간격으로

한 코스씩 831일 가지 완주 하였고,

 

942차 순례 부터는 주1회 걷기로 계획하였다.

걷는 속도는 3km1시간으로

6~8km 마다 20여분 쉬고 있다.

 

이번 911일에는

성판악코스로 백록담을 등정할 계획이다.

 

제주올레 10코스는

안덕면 화순백사장에서부터

우리가 모슬포라고 부르는 대정읍 하모리 체육공원까지

15.6km로서 40여 리 올레이다.

 

1차 제주올레 순례에서도 가장 먼저 10코스를 선택한 것은

최근 송악산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그러한 개발 행위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에서 개발을 책동하는

나쁜 지신(地神)을 밟고

좋은 지신(地神)의 기를 북돋기 위함에서이다.

 

10코스는

안덕면 화순리, 사계리 산방산을 지나

사람발자국, 동물발자국 화석을 넘어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 하모리를 감돌게 된다.

 

올레를 순례하면 살피는 문화 흔적 자료는 

서귀포시 지명유래집(1999), 남제주군 고유지명(1996), 북제주군지명 총람(2006)을 근간으로,

그리고 관련 지역 향토지와 읍면지, 마을 소개 자료를 인용하여 살피며

마을 주민 원로를 만나 의견을 구하고 있습니다.

 

1. 제주올레 10코스 안내소

화순리/산방촌/동수리·범천/범질천/볏내/번내

2. 고도리터(화순리 811)

3. 화순백사장

4. 원당밧(일뤳당)

5. 저수(猪水)/돗물/녹남물/작지물/새물화순리 833-1번지)

 

6. 하강수(화순리 861-2번지 주변)

7. 화순리 어은동(저수 윗마을)

8. 사간다리동산(화순리 1913)

9. 무반석 武班石(사간다리 위화순리 1918번지)

10. 솔대왓(화순리 1909번지 일대)

 

11. 주슴질(1912)

12. 소금막(백사장 서쪽)

사계리/자단리(사계·덕수·동서광리)/금물로리/거물로/거문질/거물질/동사계리·사계리

13. 산방산

14. 냉이돌(산방산 정상에 있는 바위)

15. 정운디 닥밭(사계리 275)

 

16. 황우치(黃牛)(사계리 85)

17. 소금막(사계리 86번지)

18. 산방연대

19. 연디목(사계리 3689) 도로

20. 하멜표류지

 

21. 날콤구석(사계리 104)

22. 용머리

23. 복병리(伏兵里)/황우산사(黃牛山寺) /용머리 능선

24. 설쿰/설쿰원/몰래원/모살원

25. 쫀물빌레(설쿰 바닷가 일대)

 

26. 빌레원(설꿈 서쪽)

27. 고가물/고개물(사계리 1957)

28. 용해동

29. 토끼동(사계리 2124)

30. 사계리포구/태걔/토끼포구(土基)/흑로포(黑路浦)/금로포金路浦

 

31. 앞원(토끼동 앞바다/사계포구가 있다)

32. 곱은개(사계리 2147-36)

33. 볼락여

34. 사계천

35. 사장밧

 

36. 송죽동

37. 사계해수욕장

38. 거우대개/거우대포구(사계리 3531-1)

39. 군여(안덕면 형제해안로 80/산계원식당 남쪽)

40. 절잔개/절장개/절잔개원(사계리 2329번지 해안체육공원 동쪽

 

41. 여배파헌여(전잔개 서쪽)사계리

42. 사람발자국 화석산지

43. 형제섬/골애기섬/형제도(사계리 산 44)

44. 만다리 해안(사계리 3559/상모리 경계 지점)

상모리/모슬포리/웃모슬개/·하모슬리/·하모리/

45. 절잔개(상모리사계리 바닷가 경계 해역)

 

46. 용다리창(상모리 1-5) 전경초소 앞

47. 산이수동/산이물/생이물/(상모리 126)

48. 산이수동 패총

49. 돈잎(대정읍 형제해안로 304) 산이수동 앞 바다

50. 살레덕코지(포구 동쪽)

 

51. 산이수동포구/산이물개/조수포鳥水浦)

52. 빅께통코지(포구 남쪽)

53. 송악산 일제동굴진지

54. 부남코지

55. 가파도

 

56. 마라도

57. 송악산/절울이/저별악(貯別岳)

58. 저별봉수

59. 대낭골(상모리 248)

60. 몰잡은목(상모리 246)

 

61. 붉은오름/붉은봉(상모리 산5~6)

62. 진누룩돌(상모리 산2-1) 전경초소 주변 해안가

63. 개다리구석 해안(상모리 산 2-33) 송악산 서쪽 해안가

     - 대난골모살(상모리 274 주변 해안사장)

64. 외륜일제동굴진지

65. 동알오름

 

66. 섯알오름

67. 고사포진지

68. 양민학살터

69. 문세왓/문서왓(상모리 1560) 학살터 서북쪽)

70. 일제 격납고

 

71. 놀래왓/놀란밧(상모리 1965)

72. 알뜨르비행장

하모리/알모슬개/알모실개

73. 집근개/심포深浦(하모리 143)

74. 큰개창(하모리 142)

75. 큰개창원

 

76. 20수용소<하모리 중공군포로수용소 유적(하모리 105)/>

77. 광대원(하모리 196)

78. ᄀᆞᆺ디/ᄀᆞᆺ디물(하모리 247)

79. 멜캐/약포동 鰯浦洞 <하모리해수욕장 일대(하모리 628)>

 멜캐/저금개/행어포行魚浦/약포鰯浦<하모리 141번지(하수처리장 앞>

 멜캐/운진이/운준이/하모리 해수욕장 일대

80. 모살물(하모해수욕장 동쪽 용천수)

 

81. 하모리해수욕장

82. 후릿바당(해수욕장 바닷가)

83. 고참봉원(운진항)

84. 부삿가름(하모리 634. 주변 운진항마을)

85. 운진이개/하모리포구/운진항

 

86. 운진이코지(포구 서쪽)

87. 메역쉬동산/멕쉬동산/멱시동산(운진항 서쪽 동산)

88. 생치원(포구 내)

89. 하모1리 불턱(대정읍 최남단해안로109번길 3)

90. 문수물당(하모1 656-4)

 

91. 가막소리/가막수리(하모리 681번지 해안)

92. 동골동산/동굴동산/조개동산(하모1 566)

멜캐연대/행어포연대行魚浦/무수연대無水·茂首(멜캐 서북쪽 동산)

93. 걸메물동네/(하모2 796)

94. 걸메물/걸메(하모리 449)

95. 대정중학교

 

96. 섯창밧/설창밧/무수물/문수물/무시물/무수물동네/석회통

하모2리 남쪽/서부보건소 남쪽(하모리 767)

97. 하모 체육공원

제주올레 10코스 종점

제주올레 11코스 출발점

 

제주올레 10코스 출발점

안덕면 화순리 화순백사장, 09시 15분에 출발합니다.

 

화순리는

산방촌/동수리·범천/범질천/볏내/번내라 하였습니다.

화순백사장 '돗물' 주변에 야자수 심어 정취를 돋우고, '돗물'에는 갈대가 가을 나들이를 

 

돗물 휴게소,

9코스를 걸어 오시게 되면, 반드시 이곳에서 고생시킨 족님을 위한 족욕 잔치를

 

저수(猪水)/돗물/농남물/작지물/새물

 화순리 833-1번지 주변에 있다.  지난날 이곳까지 해안이었을 때, 농어가 많이 들어와 썰물 때 가두어 잡았다고 하여 "농남물, 중산간 '서림수'를 발원으로 하는 돗물에 멧돼지들이 자주 내려와 물을 먹었다고 하여 '돗물'이라 부른다.

 

고도리터

돗물 위 주변, 화순리 811번지 일대를 말한다. 주변 지형이 고도리(고등어 새끼)를 닮았다고 하여 부르는 지명이다.

 

화순 금모리/백사장

지금은 해경부두가 되면서 관광객 발길이 많지 않다. 또 이곳 부두를 건설하며 축조된 방파제로 인하여 용머리 해안선 항우치 주변 모래가 계속 유실되고 있다. 1970년대 그 많던 모래가 다 사라졌다. 지금도계속 사라지고 있다. 대책이 없다. 빌딩이 지어지면서 빌딩바람 골이 생겨나듯이, 방파제 축조가 주변 해안선을 변화시키고 있다.

하기사 언제 인간이 자연을 생각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나

환경이 우리에게 재앙을 주는게 아니라,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하강수/하강물

이처럼 담수가 풍부한 백사장이 어디 있을까. 화순백사장은 복 받은 터전임에도 불구하고,

항만 개발로 인하여 백사장이 몸살을 하고 있다. 화순리 861-2번지 주변

그렇다하여도 이곳으로 와서 발을 담궈보시면, 물속에 비추는 자신의 모습을 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

 

하강물 족욕 쉼터

하강물 동쪽(올레 안내도 북동향)에 상약수가 있는데, 이곳 보다 물줄기는 약하여도 참 좋다.

 

솔대왓

과거 해안선에는 왜적의 침입이 잦아 군사 주둔지가 많다. '솔대왓'은 '솔대(과녁)'를 세워 활쏘기 연습을 하였던 '밧'을 '솔대왓'이라 하는데, 화순리 1909번지 일대이며 '사근다리' 북쪽에 있다.

 

주슴질/주심질走諗

해안으로 왜구(일본)가 침입을 하면, 이 길을 따라 대정현청으로 가서 보고를 하였다고 하여 불려진 지명으로, 화순리 1912번지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도로를 말한다.

 

사간다리동산/사근도리동산

해수욕장 서쪽 동산을 말한다. 동산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화순리 1913번지 일대이다.

전설; 풍파로 인하여 이 동산 까지 모래가 쌓이면 풍년이 들고, 정상에 모래가 씻어 가면 흉년이 든다고 하여 불려진 지명이다. 부두가 만들어지면서 이러한 현상이 사라졌다고 한다.

 

무반석

사간다리동산에 있다. 화순리에는 동서에 각각 큰 바위가 있는데, 이를 유반석, 무반석이라고 한다. 반대가 되는 유반석(儒班石)은 마을 동쪽 황개천 '기정밧' 위에 있다. 무반석(武班石)은 사간다리동산(화순리 1918번지)에 있다.

신작로 중심으로  동쪽은 유반, 서쪽은 무반들이 거주하였는데, 유반들이 술수를 써서 무반들이 스스로 무반석을 무너지게 하였다. 그때 무반석에 있던 청비둘기가 날아가 버리자, 이 때 부터 유반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무반석에서 화순해수욕장과 감산리 월라봉, 박수기정

 

사간다리에서 해경부두

말이 해수욕장이지, 부두 안에 있으니, 이 모습으로만 본다면, 해수욕장이라 하기도 민망스럽다.

 

사간다리동산에서 산방산

 

사간다리동산 무반석

이곳에서 날아간 청비둘기는 어느 해변 기슭에 둥지를 트셨는지,

소금막 해안, 용머리해안, 송악산, 

 

소금막 해변

이 해변을 동서로 하여 동쪽은 화순리, 서쪽은 사계리가 시작된다.

사계리는 자단리(사계·덕수·동서광리)/금물로리/거물로/거문질/거물질/동사계리·사계리

 

용머리해안, 송악산해안, 가파도, 마라도, 형제섬을 다 바라볼 수 있다.

 

사간다리동산

역방향

 

소금막 해변

지질 설명에 따르면, 약 5천년 전에, 안덕면 이 지점에서 8.5km 북북동향에 있는 상창리 병악(소병, 대병)의 화산 활동으로 분출된 용암이 이곳까지 흘러와 풍화와 침식작용이 반복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탐라국에서 80만년 전에  화산활동을 했다는 산방산은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궁금하다.

 

분명 이곳에는 야영이 금지되어 있는데,  저 텐트는 무얼까요???

 

소금막 해변

산방산, 용머리해안, 송악산

 

소금막 웅석

 

사계 소금막 곶자왈 올레

 

1970년대 이곳에는 이렇게 돌이 없었는데,

저디 저 앞에 보이는 방파제가 축조되면서, 이렇게 모래가 바다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용머리 해안선도 마찬가집니다.

이러다가는 금세기에 저 용머리해안도 사라질 수가 있습니다.

바다 속 환경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소금막

산방산 남쪽, 사계리 86번지 일대이다. 과거에는 소금막이 있었는데, 지금은

 

황우치(黃牛)

지형이 누런소의 머리와 같다고 하여 불려지는 지명이다. 사계리 85~87번지 주변이다.

 

화순 해수욕장이 사라지고 있다.

 

화순해수욕장 부두 방파제 공사로 인하여 모래가 유실되면서 

80만년 전 산방산이 솟아오른 이후 쌓여진 모래가 이제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부터 대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용머리 눈빌레 해안

너럭바위(빌레)가 길게 누워 있는 형국이라 불려진 지명이다.

지금 이 모습을 우리는 언제까지 볼 수 있을 것인가.

 

산방산 용암돔의 남쪽 해안에 작은 돌기처럼 돌출에 있는 형상을 보이며 분화구 높이에 비해 분화구의 크기가 큰 응회환에 해당한다. 한라산과 용암대지가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인 약 100만 년 전에 남해 대륙붕에서 일어난 수성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주로 현무암질 응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수성화산체에 해당하며, 해안의 절벽은 오랜 기간 퇴적과 침식에 의해 마치 용의 머리처럼 보이는 것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수성 분출 도중 화산체의 붕괴가 일어나 세 개의 화구로 위치가 변화하며 분출하였다. 따라서 용머리 해안을 이루는 층들도 큰 규모의 절단면 또는 침식면에 의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운반된 화산쇄설물로 세 묶음의 지층으로 나뉜다. 이들은 용머리의 분출 도중 일어난 대규모 화산 붕괴와 침식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층 내의 퇴적구조와 암상을 통해 용머리 응회환은 분출 당시 상당히 습한 조건 즉 수성화산에서 분출해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성산일출봉·수월봉과 달리 화구가 이동하며 생성된 특이한 지질학적 특성을 갖고 있다.

전설에는 진나라 시황제가 탐라에서 제왕이 탄생할 것을 우려하여 고종달을 보내 혈맥을 끊도록 하였다. 용머리에 다다른 고종달먼저 용의 꼬리를 자르고 허리를 두 번 내리친 다음 머리를 자르려 하자 피가 솟구쳐 흘려내려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산방연대 가는 올레

 

사계리 황우치 해안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에 육군제1훈련소에 필요한 지원을 위해 수송산이 정박하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복병목

연대 바로 동쪽 움푹 패인 지대를 말하는데, 군사가 매복하는 길목이라 불려진 지명이다.

 

산방연대

서쪽으로는 하모리 무수연대,  동쪽으로는 하예동 당포연대와 교신을 했다.

 

산방연대와 산방산

 

용머리, 복병리/황우산사

복병리는 용머리 능선 일대를 말하며, 군사를 매복하는 복병목에서 유래한다.

황우산사는 이 곳에 작은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불려지는 지명이기도 하다. 

 

하멜 표류비

1653년 8월 16일 표류한 하멜 일행의 표류에 대한 비를 1980년 10월 12일 건립되었다.

 

산방산

산방산은 해발 365m의 거대한 용암돔으로서 약 80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 점성이 매우 큰 조면암질의 용암이 분화구에서 서서히 흘러나와 멀리 가지 못하고 굳으면서 돔 형태로 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산방산은 사냥을 하던 사냥꾼이 화살을 잘 못 쏘아 옥황상제를 건드리게 되자 이에 화가 난 옥황상제가 산봉우리를 뽑아 던졌는데, 이 때 날아와 박힌 것이 산방산이 되었고, 움푹 파인 것은 백록담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산방굴사(山房窟寺)의 천장 암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산방산 수호신인 여신 산방덕(山房德)이가 인간 세상의 시달림을 받고 바위가 되어 흘러내리는 눈물이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곳 굴사에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 하여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다.

산방산은 난대성식물이 주로 자생하고 있으며, 특히 남쪽 암벽에는 지네발란·풍란·석곡·섬회양목 등 희귀식물 등이 자라고 있다.

 

날콤/날콤구석

용머리 서쪽으로, 하멜 표류 상선 모형과 해녀 음식점 있는 지역을 말하며, 이곳 서쪽으로는 '설쿰'이라고 한다. 사계리 116-7번지 일원 해안이다. 밖으로 내밀어진 지형 안쪽이라고 하여 불려지는 지명이다.

 

날콤구석 해안

 

산 아래 산은 산방산

산 우에 산도 산방산

 

설쿰 해안/설쿰원/몰래원/모살원

설쿰은 바위가 얼기 설기 얽혀있는 형태를 말하는 제주어,  ② "눈이 쌓였을 때 바람이 불면 눈 구멍이 생기는데, 이러한 현상을 '눈 속에 생긴 구멍'이라하여 설혈雪穴이라 하는데, 설혈이 변형되어 설쿰이라 하였다고 한다."

 

설쿰 해안/설쿰원/몰래원/모살원 해안선

 

닥밧 정운디

사계리 275번지 일대 넓은 밭으로 닥나무가 많아 불려진 지명이다. 

정운디 전설; 이 닥밭에는 천하장사 '정운디'가 살았다. 정운디는 사계리 닥밧 동네 요산 이씨 댁 종이었으며, 닥밧에 살았기 때문에 "닥밧 정운디"라 불렀다. 당시 대정현 오찰방과의 씨름판이 전설로 전한다.

 

고가물/고개물

양가물 아래에 있는 논물이며, 주변 일대가 고씨 집안 논이라서 불려진 지명이다. 사계리 1957번지 일원이다.

 

사계리포구/태개/토끼포구(土基)/검은질개/흑로포(黑路浦)/금로포金路浦

 

곱은개/토깃개

토깃동네 옛 포구였다. 사계포구 동쪽 둔덕에 있다. 포구가 굽어 있어 불려진 지명이다. 

안쪽에는 '토깃개당'이 있다.

 

토기동

토깃개를 중심으로 설촌된 동네이다.

웃동네 도요지에서 굽은 토기를 실러 날랐던 동네라 불려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라이샤 여사 사계리 어촌 방문

구소련 연방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1991. 4. 20. 우리나라 노태우 대통령과 정상회담 중, 양국 대통령 부인(김옥숙, 라이샤)이 사계리 포구 서쪽 '남데기' 해안에서 좀녜들의 물질을 보면서 직접 채취한 수산물을 놓고 대화를 하였는데,  그 내용을 조각으로 설립하였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1991. 8. 18. 쿠데타에 의하여 실각되고 소련 연방은 해체되었다.

 

선짓여

선짓여; 포구 서방파제가 축조된 해역이다.

 

납데기 빌레여

납작한 빌레가 있어 불려진 지명으로 '선짓여' 서쪽 해역이다. '빌레'는 너설을 의미하는 제주어이다.

 

사계 백사장

 

사계포구/선짓여/납데기빌레

 

성제섬/관도/골애기섬/골레기섬/형제도/형제섬

사계리 산 44번지이다. 골애기는 쌍둥이의 제주어이다.

 

전설; 조선 숙종 38년(1712) 8월에 용 두 마리가 형제섬 앞에서 싸움을 하였는데, 그 여파로 해일이 일고 큰 바람이 불어, 섬 앞에 있는 검은질에 피해가 막심하여 가옥 66채가 파손되었고, 해변 소나무들이 많이 훼손되었으며, 모래가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가 농지에 낙하되면서 피해가 컸었다(박용후 남제주군지 자료)고 한다.

 

성제섬/관도/골애기섬/골레기섬/형제도/형제섬

   성제섬은 9천 년 전에 수성화산 활동으로 솟아 올라 그동안 깍이고 깍여 남아 있는 섬이다.

   그에 비하여 송악산은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3천 7년 전에 수성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앞으로 시긴이 흐르면, 성제섬과 같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군여/군여코지

안덕면 형제해안로 80번지 앞 해안가에 바위가 드러나 있는 곳이다. '여'가 여러가 모여 있어 불려진 지명이다.

 

3~6월에는 흰물떼새에게 축복을,

 

참 고마우신 분들이시다.

 

절잔개/절장개/절잔개원

사계리 2329번지 해안이다.

사계 체육공원 남쪽 해안으로, '군여' 서쪽에 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 주변 해역에만 잔잔하기에 불려진 지명이다.

주변 서쪽으로 절잔개물, 여배파헌여, 거우대개가 있다.

 

절잔개/여배파헌여/거우대개

 

여배파헌여

'절잔개' 서쪽으로, 왜배(일본배)가 이곳에서 파손되었다고 하여 불려진 지명이다.

 

거욱대개/거우대

마을에서 서쪽해안가로 마을에서 내려오는 도랑이 있는 해변이다. 이곳이 허하다고하여 거욱대(솟대)를 세웠었다. 이는 과거에 이곳에 말을 많이 방목하였는데, 사고가 많이 나자, 이를 예방(방쉬)할 목적으로 거욱대를 세웠다고 한다. 

 

사계리 해안

 

사계리해안 동영상

 

만다리 해안

사계리와 상모리 지선 경계에 있는 해안이다.

 

사람발자국과 동물발자국 화석

사람발자국화석은 우리 인류의 기원과 진화를 밝혀 주는 귀중한 자료일 뿐 만 아니라, 당시 이 지역에 생존하였던 우리 조상들의 삶의 자취를 해석하고 자연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아니 될 소중한 유산이다.

 

"제주 사람발자국과 동물발자국화석 산지"의 지층은 해안가에 쌓인 응회암질 쇄설성 퇴적층으로서, 방사성 탄소 동위 원소 연대 측정 자료에 의하면 약 15천 년 전에 형성된 것이다.

이 화석 산지는 도내 지구과학 교사인 강지현 선생님에 의하여 처음으로 알려졌으며, 2001815일 한국교원대학교 김정률 교수 연구팀에 의하여 수많은 동물의 발자국 화석이 산출되는 것이 도내 언론에 최초로 소개 되었다. 제주도의 사람 발자국 화석의 산출은 20048월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국제 지질학회의 (IGC)에서 발표되었다.

 

또한 화석 산지에서 500여 점의 수많은 사람 발자국 화석과 함께 우제류,장비류, 육식 동물, 조류()의 다양한 발자국 화석, 새의 깃털, 연체 동물, 절지동물 및 식물 화석 그리고 수 없이 많은 무척추 동물의 생흔 화석이 산출된다. 이처럼 다양한 화석들이 사람 발자국 화석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는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거의 알려진 바 없다.

2005년과 2007년 제주특별자치도에서 개최된 사람발자국화석에 대한 국제심포지움을 계기로 2008년 국제학술지Ichnos특별호가 출판되었고, 이를 통하여 인류의 기원을 찾아 인류의 발자취를 연구하는 "인류 생흔학(Homind Ichn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와 Hominipes modernus라는 신속 신종의 사람발자국화석 이름이 탄생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 곳 발자국화석 산지는 사람발자국화석의 이름이 탄생한 곳이며, 동시에 "인류 생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탄생하게 한 발상지로써 중요한 의의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사슴발자국 화석(자료 사진)

 

사람발자국 화석(자료 사진)

 

사람 동물발자국 화석 산지

 

대정읍 상모리

상모리/산방촌/제2모슬포리/상모슬포리/모슬포리/웃모슬개/모슬리

상모1리; 이릿동네/이교동/산이물동네/산이수동

상모2리; 대촌마을/대동부락/서상굴동네/서상동

상모3리; 서하동/중하동

 

용다리창

대정읍 상모리 1-5번지 앞 해변이다.

산방산 앞이 용머리라면, 이곳은 용의 다리에 해당한다 하여 부르는 지명이다.

 

상모리 패총유적

상모리 산이수동 마을 해안에 길게 형성되어 있는 상모리패총 유적은 1988년에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생활 주거지인 남쪽의 평탄한 유물 산포지와 퇴적층 구역, 그리고 패총구역인 사구층 지역과 그 주변으로 나누어지며, 출토된 토기는 공렬토기로 도내의 민무늬토기를 대표한다.

 

살레덕코지

'산이물개' 동북쪽 대정읍 형제해안로 280번지 주변 해안 코지이다. 찬장(살레)처럼 지형이 닮아 불려진 지명이다.

 

살레덕 코지 해안

 

산이수동포구/산이물개/조수포鳥水浦)

 

점심 하기에 좋은 식당

산이물식당을 추천합니다.

 

산이물개/산이물/돈잎/빅게통/일제동굴진지/송악산/부시리덕

 

산이수동/산이물/생이물

산 밑에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하여, '산이물/생이물'이라고 한다. 산이수동은 약 400년 전에 설촌되었으나, 패총 유적으로 볼 때는 이미 오래전 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생이'는 새를 말하는 제주어이다. 상모리 126번지 주변이다. 

 

산이수동 좀녜 불턱

산이물 서쪽에 있다. 

 

돈잎

마라도 선착장 방파제 북동 해안이다.

 

상모리 마라도 유람선 선착장

방파제 시설로 이렇게 모래가 쌓이면서 해안선이 보호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다른 한쪽에 모래는 유실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라도 유람선 선착장

해안에 모래가 많이 쌓이고 있다.

 

송악산 일제 해안 동굴진지

 

이 시설물은 일제강점기 말 패전에 직면한 일본군이 해상으로 들어오는 연합군 함대를 향해 소형 선박을 이용한 자살 폭파 공격을 하기 위해 구축한 군사 시설이다. 그 형태는 자형, ‘H’자형, ‘자형 등으로 되어 있으며 제주도의 남동쪽에 있는 송악산 해안 절벽을 따라 17기가 만들어졌으며, 풍화로 인하여 여러개는 함몰되어 있다.

 

제주도 주민을 강제 동원하여 해안 절벽을 뚫어 만든 이 시설물은 일제 침략의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함과 더불어 전쟁의 참혹함과 죽음이 강요되는 전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일제는 송악산에 동쪽에는 해안동굴진지, 정상을 기점으로 불쪽 능선 따라 외륜동굴진지를 구축하였다.

 

송악산 일제 해안 동굴진지

송악산 동남해안선에는 일제가 구축한 진지동굴 17개가 있다.

 

송악산에서 산방산 해안

 

송악산 일제동굴진지

송악산 능선 가운데 동쪽 산방산 방향으로 축조된 진지이다. 1943~45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송악산 북부 능선 따라 동서를 기준으로 22개 진지가 구축되었는데, 이를 송악산 일제외륜진지동굴이라고 한다.

 

부남코지

송악산 전망대가 있는 곳으로 가장 동쪽에 있다.

이곳에 가면 서귀포시 해안 절반 이상을 볼 수가 있는 곳으로, 마라도, 가파도를 볼 수 있다.

 

 

송악산 정상으로 오르는 올레

 

산방산

 

성제섬

 

마라도, 가파도

송악산 굼부리에서

 

부남코지

 

↑송악산, 암메창/가메창

송악산 정상 굼부리(분화구)를 가르키는 지명이다. 깊이가 69m에 이른다.

암메창은 굼부리(분화구)가 깊고 어두워서 불려진 지명이며,

가메창은 굼부리 모양 새가 가마솥 닮아서 불려진 지명이다. 

송악산은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3천 7년 전에 수성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앞으로 시긴이 흐르면, 성제섬과 같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송악산 굼부리에서 동영상

 

송악산/절울이/저별악(貯別岳)

송악산 굼부리 남쪽 방향

송악산에 저별봉수가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호산봉수, 북서쪽으로는 모슬봉수와 교신했다.

 

송악산 남동향

 

부남코지

 

부시리덕

부시리(방어 종류)를 낚는 곳이라하여 불려진 지명이다.

 

부남코지

 

절동용숙이 해안

송악산 남쪽

 

송악산

부남코지에서

 

부남코지

 

붉은오름

송악산에 딸린 오름군 가운데 하나이다. 송악산에는 크고 작은 봉우리가 99개가 된다더라

 

붉은오름/붉은봉

상모리 산5~6번지에 있으며, 오름 전체가 붉어서 불려진 지명이다.

 

진누룩돌

제1전망대 바로 아래 해안 절벽지대, 전경초소 기지 남쪽 절벽 해안으로, 상모리 산2-1번지 주변이다.

돌 빛이 누런 색이어서 불려진 지명이다. 

 

진누룩돌 해안선

 

대낭골/대난골

대나무가 많이 있어 불려진 지명이다. 상모리 248번지 주변이다.

 

몰 잡은목

제1전망대 북쪽 구릉지대로서, 상모리 250번지 일원이다.

송악산이 넓어 말(몰)이 도망가면 쉽게 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곳 지형이 목이어서, 이곳에 오면 말을 잘 잡을 수가 있어서 불려진 지명이다. 

 

몰잡은목/대낭골

역방향

 

개다리구석

상모리 산 2-33번지 일원, 송악산 서쪽 해안가

 

송악산 9km 지점

14시 50분 지나다.

 

붉은오름/대낭골/몰잡은목

역방향

 

 

대난골모살

<원대정군지> 송악산 서쪽 해안선이다. 해역 수심이 얕다. 만처럼 되어 있으며 검은모래 사장이다. 대낭골 주변에 있어 불려진 지명으로, 상모리 274번지 주변 해안 일대

 

개다리구석 해안선

역방향

 

집근개/심포深浦

하모리 143번지. 하모리 하수처리장 남쪽으로 가장 서쪽에 보이는 코지 사이에 있는 만이다.

 

여백잇개

상모리 지역으로 대정읍 최남단해안로 412번지 앞 해안에 축조된 작은 포구이다. 알뜨르비행장 남쪽 끝 환태평양소공원 해안에 있는 포구이다.

 

제주 송악산 외륜 일제 동굴 진지

이 시설물은 전략 요충지인 알뜨르 비행장 일대를 경비하기 위한 군사 시설이다. 송악산 외륜에 분포하고 있는 동굴 진지는 모두 22개소에 이르며, 동굴과 출입구의 형태가 지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총 길이가 1,433m로 제주도 내에서 확인된 일본군 동굴 진지 가운데 두 번째로 규모가 크며, 출입구 수는 41곳으로 제주도 내에서 가장 많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군 군사 시설의 하나로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 기지로 삼고자 했던 증거를 보여주는 시설물이다.

 

섯알오름 가는 올레

 

섯알오름 능선

오름 남쪽 아래 부분에 일제가 구축한 진지동굴 4개소가 있으며, 위에는 고사포 진지 동서 오름에 각각 2개씩 4개소가 있다.

 

 

바람의 느낌으로

 

알뜨르 비행장

 

동알오름

 

섯알오름

 

섯알오름 올레문

 

고사포진지 가는 올레

 

셋알오름 일제 고사포 진지

 

이 시설물은 당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 알뜨르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 시설이다. 1945년 무렵에 원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구축된 고사포 진지로, 5기의 고사포 진지 중 4기는 완공되고, 나머지 1기는 미완공된 상태이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군 군사 시설의 하나로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 기지로 삼고자 했던 증거를 보여주는 시설물이다.

섯알오름 동쪽에 고사포진지 2개소, 제주예비검속사건 희생자 학살터 서북쪽 오름(섯알)에 각각 2개의 고사포진지가 있다.

 

 

제주 셋알오름 일제 고사포 진지

 

안내판 자료 사진 인용

 

안내판 자료 사진 인용

 

섯알오름에서 모슬봉(11코스)

 

가파도, 마라도

섯알오름에서 

 

여백잇개

상모리 지역으로 대정읍 최남단해안로 412번지 앞 해안에 축조된 작은 포구이다. 알뜨르비행장 남쪽 끝 환태평양소공원 해안에 있는 포구이다.

 

섯알오름 양민학살터 안내문

 

추모정

 

섯알오름 예비 검속, 양민학살터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자료

[진실규명결정] 제주 섯알오름 예비검속 사건

2015.04.17 1

< 요약 >

 

1. 강경도(姜敬道, 사건번호 다-3351) 외 217명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6~20일경, 그리고 약 한달 후인 8월 20일(음력 7월 7일)에 제주도 남제주군 상모리 섯알오름에 위치한 일제시대 탄약고로 쓰이던 굴에서 해병대사령부 산하 모슬포부대 제○중대 ○소대 소속 부대원 및 동 사령부 산하 제○대대 소속 분대장 급 이상의 하사관들에 의해 각각 집단총살 당하였다.

 

2. 위 사건의 경위를 보면, 1950년 6월 25일 제주도경찰국이 내무부 치안국의 통첩을 받아 관할 경찰서에 요시찰인 및 불순분자를 일제히 구금할 것을 지시하자, 모슬포경찰서는 관할 지서인 한림지서․고산지서․안덕지서․두모지서․저지지서․대정지서․무릉지서에 각각 지시를 내려 예비검속 대상 주민들을 연행하여 구금하도록 하였다. 이에 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들은 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 한림 어업조합창고, 무릉지서 창고에 각각 구금되었다. 구금 장소인 창고 경비는 경찰, 그리고 경찰 소속 의용소방대원들이 담당하였다.

 

3. 모슬포경찰서는 구금한 예비검속자들의 과거 경력을 조사하고 명부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실무는 모슬포경찰서 사찰계가 담당하였다. 이들은 예비검속자들을 개인별로 심사하여 종별(種別)로 사정(査定)하고, 전체 D․C․B․A의 4등급으로 분류하였다. 이 가운데 B․A급은 석방 또는 계속 구금되었고, 나머지 D․C급은 1950년 7월 16일, 그리고 8월 20일경 두 차례에 걸쳐 해병대 당국에 송치되었다. 당시 모슬포경찰서의 보고를 보면, 전체 344명을 예비검속하여 이 가운데 D․C급 252명을 송치하였다. 이들 D․C급으로 분류되어 송치된 예비검속자 가운데 일부는 석방되었지만, 대부분 총살되었기 때문에 경찰의 등급 분류는 예비검속자 집단총살의 일차적 기준이 되었다.

 

4. 해병대 당국에 송치된 예비검속자들은 두 차례에 걸쳐 집단총살 당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청인․참고인 진술, 경찰 공식문서에서 확인되었다. 1차 총살은 해병대 모슬포부대(부대장 김○○)에 의해 1950년 7월 16~20일경에 집행되었다. 이 때 모슬포 해병대원들은 총살장소인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 미리 도착, 지휘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렬종대로 서서 대기하고 있다가 트럭에 실려 온 민간인들을 한 사람씩 끌고 가서 굴 입구에 세워 놓고 총살을 집행하였다. 2차 총살은 모슬포 주둔 해병대 제○대대(대대장 김○○)에 의해 1950년 8월 20일에 집행되었다. 해병대 ○대대 대원들은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예비검속자들을 군 트럭을 이용, 1차 총살 때와 같은 장소인 섯알오름 탄약고 터로 끌고 가서 총살을 집행하였다.

 

5. 조사결과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모두 218명으로 확정되었다. 사건 희생자는 ...... 생략......모두 218명으로 확인되었다. 조사결과, 본 사건의 희생규모는 경찰 공식문서상 249명으로 확인되지만, 진실화해위원회가 희생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희생자 수는 218명이며, 희생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희생자 수는 16명이다.

 

6. 본 사건 희생자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전체 218명 가운데, 20~30대가 168명으로 77%를 차지하였다. 이는 제주4․3사건 등의 영향으로 당시 가장 활동적인 청년세대가 예비검속의 주요한 대상이었음을 의미한다. 성별 분포를 보면, 남자가 96%로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이들 가운데는 교사(11명)․공무원(5명)․마을유지(5명) 등 사회 지도층 인물이 21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지역별 분포는 사건 지역인 한림․대정․안덕면 가운데 한림면에서 전체 58%에 해당하는 126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는 한림면이 상대적으로 지역도 넓고 인구가 많았던 점에 기인한다.

 

7. 본 사건의 희생자인 예비검속 대상자 중에는 제주4․3사건 관련자가 일부 있었으나, 이들은 보도연맹원이 아니었다. 제주지역 경찰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과거 좌익활동이나 제주4․3사건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을 주요 사찰대상자로 선정하여 명부를 작성하고 동향을 사찰해 왔으며, 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을 곧바로 예비검속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예비검속이 한국전쟁 직후 이른바 불순분자를 구속하여 전시 치안질서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지만, 제주에서는 제주4․3사건 관련자 중 살아남은 사람을 포함한 일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제거로 구체화되었음을 추정케 하며, 가해의 계획성과 의도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본 사건 희생자에 교사를 비롯하여 일본에서 유학한 지식인층과 공무원․이장 등 4․3사건과 무관한 지역사회 지도층이 일부 포함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경찰의 예비검속자 분류기준은 공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자의적이어서 구체적인 행동 여부와 무관하게 의심만으로도 군 송치대상에 포함되었다. 본 사건 희생자의 대부분은 제주4․3사건과 직접 관련 없는 사람들인 것도 이러한 사실에서 설명된다. 특히 제주4․3사건이나 좌익활동과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무고나 밀고, 경찰과의 불화, 개인적인 감정 다툼으로 예비검속되어 억울하게 희생된 경우가 많았다.

 

8. 본 사건의 가해측 지휘․명령계통은 크게 예비검속을 주도한 경찰과 총살을 집행한 해병대사령부=제주지구 계엄사령부로 이원화되어 있다. 먼저 경찰은 직접 총살을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인 가해 책임주체는 아니다. 그러나 경찰의 예비검속과 등급별 분류에 근거하여 군 당국으로의 송치와 총살집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부분적인 가해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다.

 

경찰측 지휘․명령계통은 대통령 이승만 → 내무부장관 백성욱․조병옥 → 치안국장 장석윤․김태선, 동 정보과장 장영복․선우○○ → 제주도경찰국장 이성주․동 사찰과장 이○○ → 모슬포경찰서장 강문식․동 사찰계장 채○○ → 한림지서․고산지서․안덕지서․두모지서․저지지서․무릉지서․대정지서 소속 경찰(주임 및 순경)로 정리된다.

 

다음으로 제주지구 계엄사령부, 곧 해병대사령부는 경찰의 예비검속 업무를 지휘․감독하며 예비검속자의 구속이나 석방에 관한 최종 권한을 갖고 있었다. 해병대사령부 내에서 예비검속자 처리 업무는 정보참모실에서 담당했다. 본 사건의 가해측 지휘․명령계통은 해병대사령관까지는 동일하지만, 그 이하 정보참모 및 대대급 지휘계통은 총살시점에 따라 달랐다.

 

먼저 1차 총살시점의 지휘․명령계통을 보면, 대통령 이승만 → 국방부장관 신성모 → 계엄사령관 육군총참모장 정일권 → 해군총참모장 손원일 →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 정보참모실 정보참모 고○○ → 모슬포부대장 김○○ → ○중대장 김○○ → 선임장교 안○○ → ○소대장 박○○ → ○분대(분대장 박○○)로 이어진다. 2차 총살시점에는 대통령 → 국방부장관 → 계엄사령관 → 해군총참모장 →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 정보참모실 정보참모 김○○ → 제○대대장 김○○ → 각 분대장급 이상 하사관 다수로 연결된다.

 

제주지역에서의 예비검속 실시 및 관련자 집단처형이 지니는 전국성․계획성, 그리고 군․경의 지휘․명령계통을 감안할 때,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예비검속과 총살을 지시하거나 보고받았을 가능성이 크며, 최소한 내용을 인지하거나 묵인했다고 판단된다.

 

9. 본 사건의 발단이 된 경찰의 예비검속은 일제시기에 실시되다가 해방 후 폐지되어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시행하지 않던 제도였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지역 경찰은 내무부 치안국의 지시에 따라 어떤 법령이나 규정에도 근거하지 않은 채 예비검속을 불법적으로 실시하였다. 정부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민간인 처벌의 법적 근거가 되는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단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6월 25일에 발포하고, 이어 7월 8일에는 계엄령을 선포하였지만, 제주지역 예비검속 당시에는 어떠한 법령도 적용되지 않았다.

 

제주주둔 해병대사령부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정부의 공식적인 계엄령 선포 이전에 불법적으로 계엄령을 선포, 제주지구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행정과 치안을 관할하였다. 제주지구 계엄사령부는 법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계엄령에 근거, 예비검속 업무를 직접 관장하는 한편, 민간인을 체포 구속하여 군법회의 재판에 회부하였다. 계엄사령부의 이러한 조치는 불법적인 것이었으며, 당시 계엄법의 관련 조항 및 규정도 위반한 것이었다. 또 계엄사령부는 제주지역의 예비검속을 계엄법에 따른 사법행위로 인식하였지만, 예비검속자 처리과정에서 계엄 관련 법령이나 포고를 전혀 적용하지 않았다. 계엄사령부는 계엄령에 따른 처리기준이나 군법회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예비검속자들을 집단 총살하였다.

 

10.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가 제주예비검속사건과 관련하여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건 관련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할 것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 <한국전쟁유족회 자료 인용>

 

1차 학살은 1950년 7월 16일 해병 모슬포부대 5중대 2소대 분대원

2차 학살은 같은 해 8월 20일 해병 모슬포 3대대 분대장급 이상 하사관에 의하여

민간인들이 차례로 영문도 모른채 이곳에서 학살되어 매장되었다.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터

 

일제 비행기 격납고

이 시설물은 중국 본토 공략을 위해 1935년 무렵 모슬포에 594,000규모로 조성한 비행장을 1945년 무렵에 1,320,000으로 확대하면서 만든 일본 해군 비행장의 부속 시설이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들이 제주도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건설한 전투기 격납고이다. 당시 20기가 건설되었지만, 지금은 19기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1기는 잔재만 남아 있다

 

이 유적은 제주도를 일본군의 출격 기지로 건설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지상 건축물로, 진지를 구축하려 했던 인공 동굴은 많이 있으나, 다량의 지상 시설물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이것이 유일하다.

 

문세왓/문서왓 

이 지역은 일제가 만든 비행장 부지였다. 이러한 농지 가운데 가장 먼저 이 지역에서 매매 거래가 이뤄졌다고 하여 불려진 지명이다. 상모리 1560번지 일원, 섯알오름 서쪽, 예비검속 학살터 서북쪽 입구에 있다.

 

알뜨르비행장 주차장 중간 인증샷

 

15시 55분 인증샷

 

주변에 격납고

 

알뜨르비행장

1932. 6. 20~7. 20일 까지 일본군 해군비행장으로 건설되었고,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알뜨르비행장을 추가로 건설하여 700km 이상 떨어진 중국 난징을 폭격학 위해 이 기지에서 출격하였다.  '알'은 아래, '드르'는 벌판을 의미하는 제주어이다.  

 

알뜨르비행장에서 모슬봉을 보다

 

비행장 관제탑

 

알뜨르 비행장

      대한매일신보 1906. 8. 21

 

 

  황성신문 1906. 8. 22.

 

부산일보 1932. 4. 14

 

동아일보 1932. 6. 3.

 

매일신보 1932. 7. 8.

 

매일신보 1932. 7. 26. 

알뜨르비행장 건설은

1932. 4. 2 실지조사를 거친 다음, 해군용 비행장 건설을 

1932. 6. 20일 착공하여, 한달 만에 같은 달 7. 20일에 준공되었으며,

1932. 7. 20. 오후 2시에 개통식을 가졌다.

 

개통식에는 비행기 9개. 군함 2척이 참가하였다.

알뜨르 비행장 토지는 본래 지역주민들의 소유였으나,

토지 강제 수용은 먼저 비행장 건설이 완료된 다음, 1932. 8. 9일 부터 1933. 3. 10일 까지 강제로 이뤄졌다.

 

 

놀래왓/놀란밧 

상모리 1965번지 일대이다. 

전설; 어느 날 농부가 재익로 밭을 가는데, 갑자기 소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농부는 쟁기가 빌레에 걸렸는가 하여 살펴 보았으나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농부는 땅에 밖힌 쟁기를 빼어내려고 한참을 씨름하는데, 갑자기 쟁기 술이 뿌러지면서 엄청나게 큰 구렁이가 쟁기 보섭에 걸려 땅 위로 걸려 올라오는 것이었다. 이에 농부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였다. 저녁이 되어도 밭 갈러 간 남편이 돌아오질 않자 마을에서는 다음날 농부를 찾아 나섰으나, 그 밭 가운데 난데 없이 움푹 패인 웅덩이가 있고, 옆으로는 큰 동산이 하나 새롭게 솟아 있었다. 구렁이가 땅 속에서 솟구치면서 땅이 패이면서 웅덩이가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도 이 밭에는 유독 뱀이 많다고 하며, 농부와 밭갈쇠가 놀라 사라진 밭이라고 하여 놀란밭이라고 하였다.

 

놀란밭

 

알뜨르에서 송악산

 

제20수용소

중공군포로수용소이다. 현재는 측벽 일부만 남아 있다. 하모리 105번지에 있으며, 하수처리장 북쪽 도로 건너이다. 중공군 1만5천명이 수용되었다.

 

하모리 멜케해안 올레

하모리/산방촌/모슬포폰/모슬촌/제2모슬포리/하모슬포리/모슬포리/알모슬개/하모슬리

하모1리; 멜캐, 정드르 알동네

하모2리; 구석가름, 섯가름 일대 웃동네, 당밧, 당전동, 신영물 영수동

하모3리; 구석가름, 섯가름 일대 중하동, 서상동, 돈지동

 

멜케바당

 

멜캐바당

 

운진항

 

후릿바당/약포동 해수욕장

후릿그물을 이용하여 멸치를 끌어 잡아 올리던 바다라서 불려진 지명이다.

후릿그물은 장막후림이라고도 한다.

 

물묻은부리/광대원/곳디 해안선

 

약포동鰯浦洞

 

멜캐/약포동鰯浦洞

하모리 해수욕장 일대, 하모리 628

 

운진항/멜캐/운진이/운준이/하모리 해수욕장 일대

 

하모해수욕장

 

 

하모 해수욕장, 약수동 

 

유정숙 좀녜 삼촌. 77세(1945년생) 상모리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생활하시며 5남매를 두셨다. 

해안가 지명에 대하여 말씀 주셨다. 오래도록 무병장수 하시길 기원합니다.

 

하모리 첫 지점 집근개(하수처리장)/광대원/곳디/멜캐/해수욕장

 

집근개/심포深浦

하모리 143번지 해안, 하수위생처리장 해안이다. 가파도와 마라도가 보인다.

 

물묻은부리

광대원/광대원물

광대원은 하모리 223-4번지 해안 일대이다.

 

곳디/곳디물

곳디는 하모리 247번지 일원 해안이다. 이곳에서 솟아나는 물을 곳디물이라고 한다. '곳디'는 바닷가의 제주어이다.

 

약포동

운진항 입구 마을이다.

 

이 동네가 멜캐, 약수동이라서인지 멸치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있다. 방가 방가

 

운진항 입구

 

허창현 선생 공적비

 

운진이코지/운진이원

운진항 서쪽 방파제 주변 해역이다.

 

하모리 약수동 좀녜 불턱

대정읍 최남단해안로109번길 3번지에 있다.

바로 남쪽 해안 바위에 하모리 본향 문수물당이 있다. 

 

문수물당

이 곳이 문수물당이라고 한 자료는, 대정읍지(2014)2권 p. 473 관련이다.

 

하모리 본향당이 문수물당이다.

"진성기 무가본풀이사전"에는, 문수물당은 하모리 당전동 문수물에 신당이 건립되었기에 문수물당이라 한다고 되어 있다.

 

본풀이에는 

문수물당 한집님은, 문수물에 좌정하여, 옛날 관가에서, 과거를 받아서, 귀양살이로 자식을 내보내니, 시국이 분부한 때에, 대동아전쟁 때에, 파산시켜부니, 가지 갈라단, 섯사니물 청지애집으로, 좌정하고, 또 동사니물에도 가지갈라 좌정하고, 또 여막은개에도 개당한집으로 가지갈라단 좌정하고, 또 혼 가지는 가파도 메부리로 가지갈라 가 좌정하고, 한 들(月) 육장 상을 받는 할망 항으방. 제일은 매월 3일, 7일, 13일, 17일

 

문수물당에서

섯사니물(하모3리), 동사니물, 여막은게, 가파도 메부리로 4개 신당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문수물당 제단

처음 설립은 문수물 못가에 설립되었고, 대동아전쟁(1941~45) 당시에 당이 파산되어  섯사니물(하모3리), 동사니물, 여막은게로 가지가 갈라지게 되었다. 가파도 상동 메부리당은 이보다 앞서 1865년 당시 제주도에 큰 가뭄이 들자, 상하모리 주민이 가파도로 이주하여 살게 되면서, 이 때 문수물당에서 가지 갈라 가파도 상동에 당을 건립하였는데, 지금 가파도 상동 메부리당이다. 

 

 

가막소리/가막수리

하모리 681번지 해안선이다. 지난날 군사들이 막을 쳤어기 때문에 불려진 지명이다.

 

 

동골동산/동굴동산/조개동산

하모1566번지이다.  현재 반석아파트 주변 동산이다.

 

연디왓/멜캐연대/행어포연대行魚浦/무수연대無水·茂首

멜캐 서북쪽 동산으로 반석아파트(하모1리 566번지 일원) 서남쪽에 있는 동산을 말한다.

이 무수연대는 동쪽으로는 산방연대, 서쪽으로는 서림연대와 교신했다.

 

걸매물/걸매물동네

하모2리 대정중학교 동쪽 하모리 796번지 주변이다.

 

깨눌

금년에는 태풍도 없었고, 참깨 농사가 풍년이다. 깨를 다 털고 나서는 '깨낭'을 버리지 않고 눌을 쌓았다.

참 오랫만에 보는 정경이다. 이 '깨낭'으로 자리를 구어 먹으면 참 구수하고 좋다. 문득 자리 구이가 그립다.

 

섯창밧/설창밧/무수물/문수물/무시물/무수물동네/석회통

하모2리 남쪽 현재 서부보건소 남쪽으로 하모2리 767번지 일원이다.

섯창밧; 옛날 왜구(일본)가 갖은 노략질을 하였는데, 이 때 이 주변에 진을 쳐서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여 불려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모슬포 하모 체육공원

제주올레 10코스 종점

제주올레 11코스 출발점

 

17시 27분에 도착 완주하였다.

 

고민하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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