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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소굴

相民 윤봉택 2014. 11. 7. 21:20

2014. 11. 07.

 

삼소굴(三笑窟)

 

삼소굴입니다.

퇴임 후에 머무를

토굴 하나 마련하면서

택호를 삼소굴三笑窟이라 하였습니다.

 

휘호는 한 15년 전에 사돈이신 서예가 이상순 선생이 써 주셨고,

현판 서각은

각자장이신 유영민 선생께서 판재를 마련 서각까지 하여 주셨습니다.

 

삼소(三笑)는

호계삼소(虎溪三笑)에서 차용된 것으로

호계라고 하는 시냇가에서

세 사람이 크게 웃으며 형통(亨通)하였다는 데서 비롯됩니다.

 

하여,

저의 토굴을 찾아오시는 모든 인연들 또한

삼소굴에 와서는

마음의 번뇌와 고통이 모두 소멸되어

이처럼 파안대소하며 형통하시라는 의미로

삼소굴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근대사의 고승이신 경봉대종사의 거소였던

통도사 극락암에 ‘삼소굴’ 현판이 있는데,

경봉대종사께서 18세부터 85세 까지 67년 동안 이곳에

주석하시면서 쓰신 삼소굴일지가 유명합니다.

 

그 다음에는

저가 해인사에서 수행하던 시절

1970년대 해인사 경학원 전면에

삼소굴 현판이 달린 5칸 정도의

작은 요사가 있었는데,

주로 해인사 주지실로 사용되었었습니다.

 

저가

1978년 극락암 삼소굴에 계시는 경봉 대종사님을 친견한 후

해인사 시절 부터 지금까지

극락암과 해인사의 삼소굴 회상을

늘 기억하면서

훗날 토굴을 마련한다면

택호를 삼소굴이라 하리라는 다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삼소굴이 유래가 되는

호계삼소는

중국 여산 동림사에서 시작됩니다.

 

중국 강서성 여산에

동림사(東林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을 창건하신 혜원법사(335-417)는

산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오로지 수행만 하였습니다.

 

어느 날 도반인 도교의 육수정과 유교의 도연명이 찾아와

돌아가는 길에 혜원법사께서는 산문까지 배웅하면서

담소를 나누다가,

그만 산문 밖으로 흐르는 호계(虎溪)를 건너고 말았습니다.

 

이 때 여산에 살면서 혜원법사를 지켜주던 호랑이가

혜원법사께서는 호계를 건너지 않으신다고 다짐하여 놓고서

왜 건너시냐는 의미로 크게 울자,

이에 세 사람이 호계에서 크게 웃으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호계삼소虎溪三笑라고 하는 데,

 

이는

당시 중국 사회의 정신문화를 이루는

유도와 도교 그리고 불교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하겠습니다.

 

호계삼소는

송나라 때 화승이었던 석각(石恪)이 처음으로

삼인의 크게 웃는 모습을 그리면서

지금까지 유명한 화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2007년 4월 15일

혜국스님과 같이

황산-구화산-남전참묘의 남전사지-3조선사-4조선사-5조선사를

지나 여산에 있는 동림사를 찾았었습니다.

 

이 동림사는

동진도안(314-385)의 제자인 혜원법사가 386년에 창건을 하였는데

도안(道安)스님은 지금 스님들께서 성姓을

부처님의 성씨인 석釋씨로 바꾸신 큰스님입니다.

 

그리고 도안스님은

도안스님 이전까지는 인도에서 온 승려들에 의하여 경전이 유포되었으나,

도안스님으로부터 중국에는

중국식 불교의 교리가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도안스님을 중국 불교 교리의 개척자라고 합니다.

 

또한 모든 경전에는

3분법으로 구분하여 경전을 알기 좋게 나누어 있는데,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서

바로 오늘날의 서론, 본론, 결론에 해당합니다.

바로 도안스님에 의해 모든 경이 이 때부터 3분법으로 분리가 되어집니다.

 

후에 헤원법사는 난리를 피해 여산으로 와

당시 강주자사의 도움으로 386년에

서림사 동쪽에 동림사라는 절을 창건하였습니다.

 

 동림사는 강서성에서 절경으로 알려진 여산에 있습니다.

 여산은 당송시대의 유명한 시인 묵객들이 거쳐간 곳으로서

 귀거래사의 도연명 또한 그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동림사는 백련결사白蓮結社의 정토종 발원지입니다.

 강진에 있는 백련사의 절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유명하며

 건봉사의 발징 등이 모두 정토종에 속합니다.

 

 혜원법사가 동림사를 창건하고 난 다음,

390년 7월 28일 동림사 반야대의 아미타불상 앞에서 123인과 같이 재를 마련하고

깨끗한 정업을 닦아서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기약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백련결사로서

이 결사結社가 지금의 결사 어원입니다.

 

 그 가운데 18명이 가장 정업을 잘 닦았다하여

백련사십팔현白蓮社十八賢이라 칭송합니다.



정효스님 

 

 나의 토굴, 삼소굴입니다.

 

 겨울 깊은 날, 삼소굴.

 

 

  삼소굴 겨울계곡.

 

 봄 빛 열어 오시는 날, 삼소굴 계곡

 

이렇게 함께 흐르다 보면

 

 아침을 열어 오는 시공의 그림자는

 

 善緣의 길 따라 삼소굴로 이어지고 ......

 

 오늘 문득 다가 오시는

 이 뉘시런가, 묘묘杳杳하여라.

 

 1970년, 그날의  해인사 산문은

 그대로인데......

 

 1974년 9월,

 해인총림의 대중들은 ......

 

 2012년 11월

 이 곳도 아니고, 저 곳도 아닌 ......

 

 

2014년 납월

 

 

합천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인간문화재 박찬수 선생이 조상 중인 목조비로자나불좌상

 

  - 1975년,  해인총림 금강계단에서 노스님 고암 대종사님을 전계화상으로 뫼시고 비구계를 수지한 비구계첩,

    자장율사  → .... → 대은 → 금담  → 해남초의  → 범해  → 선곡  → 용성  → 고암상언율사  →

    다시 그 시절로 환계(還戒) 회귀하옵나니,

    원수자비애납수(願垂慈悲哀納受)하여 주옵소서.

  - 2015년 현재를 돌아보니, 비구계를 주신 3사7증의 큰 율사싐들께서는 모두 열반에 드셨고,

    당시 인례사이셨던 전해인사 율원장이신 무관스님만 현존하시어 무상함을 느낌니다. 

 

 1972년 해인사승가대학, 초발심자경과 사미율을 건너,

  둘째 줄, 우로부터 네번째.

 

 1973년 해인사 승가대학 시절,

 궁현당에서 대중공양, 우측 네 번째.

 

 1973년 해인사승가대학

 관음전에서의 논강. 좌측 네번째.

 

 1971년 해인사 동안거 결제,

 해인총림 방장 성철 큰스님과 지월. 수산. 지관. 일타. 명진. 보광스님을 비롯한 대중들, 일곱 번째 우측

 

 1972년 해인사 하안거 결제,

 해인총림 방장 성철 큰스님과 지월, 지관, 일타. 명진. 도성. 법혜스님을 비롯한 결제 대중들, 다섯번 째 줄 가운데 우측.

 

 호계삼소

 

 호계삼소

 

 1973년 해인사 하안거 결제, 

 해인총림방장 성철큰스님과 혜암, 성수, 도견, 수산, 정원, 관조스님을 비롯한 결제 대중들.  둘째 줄 좌로 부터 4번째. 

 

 1973년 해인사 동안거 결제,

 해인총림방장 성철 큰스님과 봉주, 관조, 도견, 수산, 운범스님을 비롯한 결제 대중들, 좌측 화단 편백나무 옆.

 

 능엄경을 마치고 ......

 

 대승기신론(원효 소)을 마치고.

 

 1976년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화주 도명화 보살 회갑기념 사진

 좌로 부터, 첫째줄 : 정효. 조계종 종정 고암 큰스님. 도명화 보살, 동봉스님

 좌로 부터 둘째 줄 : 성욱. 성주. 종원. 동훈. 순민. 학균사형(현 선덕사 주지).

 

2010년 해인사에서 해인승가대학총동문회 기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