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앓이

송수권

相民 윤봉택 2016. 4. 4. 22:04

2016. 04, 04.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4042141005&code=100402

다음뉴스 http://news1.kr/articles/?2623948

 

 

 

    산문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를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

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

나의 시, 나의 정신

                                       송수권

 

나는 어느 지면에서나 늘 고답적으로 말해왔듯이

서정적으로 울림 위에서만 시는 가능하다고 믿으며 지금까지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훌륭한 시, 특히 고전적 성취의 시가 보여 주는 것은

첫째로 시의 완결서이 있고,

둘째로 민족 정서가 세련되어 있으며,

셋째로 언어가 조악하지 않고 정련되어 있으며,

넷째로 리듬이 유려하며,

다섯째로 울림의 공간이 증폭되어 속되거나 혐오감이 없다는 점이다.

 

또 패배감이나 무력감으로 떨어지지 않고, 읽는 이로 하여금 한없이 성스러운 경지로 끌어올려 준다.

이렇게 될 때는 시는 향수자에게 정신의 구원처를 마련해 준다.

여기에서 한 시인의 염결설, 더 나아가서는 민족의 청결성을 보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나라의 말, 즉 국어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높은 수준의 경지로 이끌어 올린다.

나는 이것을 우리 시가 내장한 미적 고유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편의 시가 고전화되어 있느냐 되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은

꼭 옛것의 고전이 아니라

어휘 구사와 작품이 추구하는 경지가 가장 개성적이고 모범적이라는 뜻이다. "

  

【사족】

시인 송수권(1940~2016.4.4.) 선생께서 영면하셨다는 비보를 뉴스를 통하여 접하였다.

1993, 나의 문학 스승이신 시인 김광협 선생께서 서거하셨을 때

그렇게 비통하시던 모습 지울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그 선생님 한분마저 세상을 떠나가셨다.

남도 고흥에서부터 서귀포 법환 돌할망집, 변산 채석강 까지

두루 김삿갓처럼 유랑하시면서

길마다 서정 깊은 작품 뉘여 놓으시더니

오늘은 이렇게 먼 길을 떠나 가셨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1년 한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아니한 1992년인가 싶다.

서귀포 법환마을 포구 동산 돌할망” 현주하 시인 댁에서

범섬을 바라보면서 작품을 스케치 하시던 모습을 뵈면서 부터이다.

선생께서는 뭍에서 내려오실 때는 꼭 연락을 주시곤 하셨다.

그러면 반나절은 김광협 선생에 대한 추억담으로 넘기고

오후에는 자리를 사다가 자리회를 만들어 먹으면서 지내곤 했었다.

가끔 사모님과 함께 내려오시기도 하셨고,

 여름 어느날엔 선생과 함께 광주에 키 낮은 자택을 찾아 가기도 하였었다.

 돌할망 현주하 시인께 비보를 알려 드리고 싶어도

 현주하 시인 또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터라, 차마 전해 드릴 수가 없음이 참 슬프다.

 그래도 고향 고흥에서 송수권문학상이 제정되어 시상되고 있음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선생께서는 등단작품 산문에 기대어에 대하여 설명도 하여 주셨다.

시에 미쳐 있으면서, 서울 한 여관에서 일반 종이에 써서 이어령 선생이 주간으로 계시던 문학사상에 보내었는데,

담당 기자는 원고지에 아니 썼기 때문에 그냥 비벼서 휴지통에 던져 버렸고,

마침 이어령 선생께서 문득 휴지통을 바라보다가 종이 뭉치를 펴 보니,

이 작품이 있어서 주저 없이 당선작으로 1975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하셨다면서,

작품에 누이는 누이가 아니라 사실은 남동생이었다면서,

그 대상을 시적 표현으로 누이라고 하셨다고 하셨다.

 

1991년 6월 <문학과 지역>이라는 종합문예지를 중앙이 아닌

지역문학인들과 뜻을 모아 창간하면서

"가장 지역적이고 향토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이다."라고 주창하시며

중앙 편중된 한국문학을 비판하시던 모습이 너무 새록하기만 하다.

 

새내기 시인인 나를 한민족방언시학회

제주를 대표하는 방언시인으로 추천하여 주셨던 일은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과분하신 배려였다고 본다.

 

선생께서는 某人<남도답사 일 번지> 쓰기 이전에

1991년 이미 남도기행이라는 역사기행집을 지으실 만큼,

선생의 작품마다 배어 있는 향토서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분명 선생은 우리시대의 마지막 서정시인이 아니셨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삼가 고인의 영전에 분향 재배를 올립니다.

영면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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