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12. 19
강진에 있는 백련사입니다.
고려시대의 한 시절
천태사상의 중심지였고
오래전부터 탐라와 뭍을 연결하는
길목이기도 하였습니다.
10021
백련사 입구에 조성된 백련지입니다.
사찰 분위기에 맞게 잘 조성하여 놓았습니다.
연지에 섬 두개만 더하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구품연지
저가 찾았을 때에는 보수 공사가 많이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잘 정돈된 담장도 이쁘고,
헌데 철근공사가 쬐끔 그렇습니다만,
석가세존을 모신 대웅보전입니다.
팔작지붕, 겹처마, 다포양식의 전면 3칸 측면 3칸의 9칸집입니다.
우측면 입구 보살상 벽화에 보면,
대웅전 단청은 당시 해인사에 계시던 금어의 이름이 나타나 있어
화승이 단청한 것 같습니다.
이곳 대웅보전도 미황사 대웅보전처럼 정면에 법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없는게 특징입니다.
대웅보전 현판이 좌우로 나누어 걸려 있습니다.
이 또한 특이합니다.
현판을 떼어 놓으면
글씨들이 학이 되어
만덕산 우를 날아갈 것만 같습니다.
어칸 기둥에 용을 만들어 장엄을 하였습니다.
대웅보전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기둥(활주)입니다.
활주 주초석 문양이 함초롬합니다.
측면 죄측 보살상에 금어의 이름이 나타나 있습니다
금당의 기둥 주초석들은 모두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초를 사용하였는데
기둥은 민흘림입니다.
귀기둥(우주)을 약간 솟게하여 건물의 안정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참 보기가 좋습니다.
금당 바로 아래쪽에 있는 누각입니다.
누각은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누하(누 아래)에는 빈 공간입니다.
누하주를 받치는 주춧돌도 자연석을 이용하였습니다.
맛배지붕, 겹처마 이익공 전면 5칸 측면 2칸의 10칸집입니다.
금당 우측면으로 진입하는 계단부의 금당축대입니다.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친 듯
돌 색깔의 무게가 그동안의 시간 흐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불단 좌우를 받쳐진 기둥 위의 주두에 해태상을 조성하여 놓았습니다.
마귀를 징벌하고, 화마를 방지하기 위함인 듯 합니다.
금당 우측 후면 퇴칸에 만덕산 백련社라하여 절寺가 아닌 모일社자를 썻습니다.
이는 고려조에 국가로 부터 지원을 받았던 대부분 사찰이 일반 사찰과 달리하기 위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社의 유래는 중국에서 비롯되었으며, 백련결사도 그러한 의미 중 하나입니다.
금당 내부는 내 4출목입니다.
제공에 나타난 문양도 달마산 미황사와 비슷합니다만,
마지막 마무리가 봉두가 아닌 문양 처리한 것이 다른 부분입니다.
금당 내부 불단 좌측 주두 부분입니다.
우측에는 해태상을 조성하였는데,
다른 수상獸像을 하여 놓았습니다.
보개(닫집) 없이 우물천장으로 마감하였습니다.
하여, 상단 위에 용을 세겨 넣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랜 세월의 무게가 보입니다.
피안에 있다는 명부전
겹처마, 이익공, 맛배지불입니다.
16나한님을 모셔놓은 응진전입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6칸집입니다
맞배지붕, 이익공, 겹처마, 민흘림 양식입니다.
기둥 주초석은 자연석을 방형으로 다듬은 방형주초석을 놓았습니다.
이익공 절충식입니다.
초익공은 위로 솟게하여 앙서가 되게 하고
이익공은 아래로 향하게 하여 수서를 하였습니다.
그 새이에 연봉오리를 놓아 장엄을 하였습니다.
백련사 사적비는 백련사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약 50여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447㎝ 규모의 전형적인 석비(石碑)이다.
귀부(龜趺), 비수(碑身), 이수(이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귀부는 고려시대의 조성으로, 비신과 이수는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되어 각기 서로 다른 건립연대를 보이고 있다.
귀부는 지대석(地臺石)과 더불어 화강암 일석(一石)으로 조성되었다.
용두(龍頭)는 목을 움츠리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입은 상·하 7개의 가지런한 이빨로 꽉 다문 모습이며, 하단에는 길게 수염이 흘러 목주름까지 늘어져 있다.
위 입술은 약간 들려 눈은 삼각형의 구도 안에 동그란 눈동자가 볼륨있게 표현되었다.
용두의 뿔은 목 뒤로 흐르며 2조로 갈라지며 비좌(碑座)에 연결되어 있다.
귀부의 등면은 너비 30㎝의 음각선으로 곽을 조성한 후 내부에 당초문(唐草紋)을 양각했다.
귀갑문(龜甲紋)은 6각형으로 내부에는 연화문을 새겼다.
네 발은 모두 5개의 발가락을 지녔으며, 꼬리는 왼쪽으로 틀어 올렸다.
귀부의 중앙 상면에는 비좌가 조성되었는데, 측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이 양각되었고, 상면에는 118㎝×15㎝ 규모의 비신공(碑身孔)이 마련되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귀부의 크기는 227㎝×190㎝×110㎝이다.
비신은 2면비로 전·후면에는 비문이, 양 측면에는 초화문을 양각했다.
비신 전면의 상단에는 자경 15㎝ 크기의 전서체로 「만덕산백련사비」라 새겼고, 횡서로 「전라도강진만덕산백련사사적비」라 기록하고 있다.
뒷면에는 당시 불사(佛事)에 참여한 사람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조정저(1631∼1690)가 지었고, 현록대부랑선군 이우(1639∼1693)가 썼는데, 상단의 전서만은 가덕대부랑원군 이간(?∼1699)이 썼다.
말미의 명문으로 보아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수에는 우진각지붕의 형태로 하단에는 목조 건축의 겹처마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정상에는 2마리의 용이 등을 맞대고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는 형상인 바, 매우 사실적인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비신의 크기는 234㎝×118㎝×29㎝이며, 이수는 170㎝×75㎝이다.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와 비신의 건립연대가 서로 다른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아 귀부는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조각수법도 뛰어나 고려시대 전기의 작풍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사적비 역시 전형적인 조선시대 석비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양 측면에 양각된 초화문은 이 시대의 석비로서는 특이한 예라 하겠다.
따라서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와 석비가 비록 시대를 달리하고 있지만, 각 부재가 지닌 양식상의 특성으로 보아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