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05. 19
경주 포석정입니다.
지난 19일 토요일 유적 답사 차 갔습니다.
사찰 경내에 견치석 쌓기로 잘못된 석축양식을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이곳은 포석정이라기보다는 포석정지(鮑石亭址)가 맞습니다.
정자는 없고
곡수거(曲水渠)만 남아 있습니다.
포석정지는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구(石構)입니다.
(안내문)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 7,432㎡이고,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있습니다.
이곳은 역대 왕들이 전복 모양으로 생긴 유상곡수(流觴曲水)에 술잔을 띄워 놓고 시를 읊으며 연회를 하던 장소로 여겨졌던 곳으로, 유상곡수는 중국의 명필 왕희지가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연회가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 하는데, 포석정은 이를 모방한 것입니다.
그러나 《화랑세기》필사본에서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社)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1998년에 이곳에서 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에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음이 알려지고, 제사에 사용되었을 제기류도 출토되어 포석정이 사당이었을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포석정의 곡수거는 가장 긴 세로축 10.3m, 가로축 약5m, 깊이 50cm가량 되는 도랑으로 모두 63개의 석재로 연결 조립되어 있습니다.
포석정 건립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 있고,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입니다.
원래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토하는 돌거북이 있었다 하나 없어졌고, 이 물을 받는 원형 석조(石槽)가 있어, 이곳에서 구불구불한 모양의 곡석(曲石)이 타원 모양으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배수구의 마무리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임의로 보수하여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원형이 많이 파손되었으며, 이러한 석구는 중국 동진(東晉) 시대부터 있었다 하나, 대개 자연의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데 비하여, 완전히 인공적인 점이 그 특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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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의 원림苑林입니다.
주로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많았습니다.
주변 지형에 따라
남산 물줄기에서 빚어낸
작은 여울이 이곳에 이르러
포석정 물골을 건너
잦은 술잔을 빚은 것이
천년 신라의 화근이었나 봅니다.
나무도 그대로
세월도 그대로
시간도 그대로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사람만 떠나고
바람만 남이 있는 듯 합니다.
포석정의 물길 열어
육신을 삭인 곳
바라보는 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이도
서럽기는 하나인 것을
포석정에 빚은 마지막 술잔은
어느 물결에 실려
주인 떠난 빈 잔으로
머언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지
저 굽이진 수로를 지나간
술잔은
어느 벽에서 금이 갔는지
수구에 담겨진
빗나간 인연도
지나보면
그 또한 소중한 인연인 것을
굽이 굽이
고븐데기 돌아 온
너와 나의 인연인 것을
예서 그대가 보인 것은
무엇이였는가
자네
이제
저 하나로 남아
모든 것
놓아야 하는 것을
저 배수구에
문득 놓아
다 띄워 보내야 하는 것을
저 갈림 수로에서
다시
오는 이를 기다리려 하시는
뜻을
부디 버리심이 옳지 않겠나
몇 번을 더 부딪혀야만
덧난
상처의 아픔을 기억하시려는가
아서
이제는
물길 닫으시고
저 먼길 얼릉 떠나시게나
하늬바람 처럼
그리운 물결 처럼
동해 바다 건너 떠나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