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08. 09.
입추 넘긴 지난 9일에는
서귀포칠십리 西歸浦七十里 의 근원지인
서귀포항의 야경을 살펴 보았습니다.
뭍사람들에 있어 서귀포는 서귀포라기 보다는 西歸浦七十里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이는 조명암 시인이 작사한 서귀포칠십리라는 가요가 널리 불려지면서 부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조명암 시인이 서귀포칠십리를 작사한 시기는 1939~1940년경으로, 박시춘 작곡,
남인수의 노래로 불려지면서입니다.
문헌 자료로 살펴 볼 때, 서귀포칠십리는
탐라지(이원진 목사 지음/1653년간) 정의현 산천조 『西歸浦 在縣西七十里 朝元時 候風處』
라고 되어 있는데, 곧 『서귀포는 정의현 서쪽 70리에 있는데, 원나라에 조공할 때 순풍을
기다리던 포구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서귀포칠십리에 대하여 시간적·공간적의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시간적 의미에서 볼 때, 서귀포칠십리는 성읍 현청에서 부터
서귀진까지 이어지는 “원님질(질;길의 제주어)”지나
서귀포구까지의 단순한 거리 개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적어도 1416년 제주도가 제주목. 정의현·대정현으로 행정 구역이 개편 되고 난 이후
1914년 제주군으로 통합되어 우면·좌면으로 변경되기 까지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간적 의미에서 볼 때 서귀포에 있어서의 서귀포칠십리는
단순한 지명이나 시간적 차원을 넘어 서귀포시민들의 이상향으로 승화되어 있다고 봅니다.
즉 시간적 의미의 단순한 거리 개념이 아니라,
시간을 뛰어 넘어, 서귀포칠십리가 간직하고 있는 향토성과 서정성을 바탕으로,
시민들이 추구하고 있는 미래의 이상향이 바로 서귀포칠십리가 아닌가합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조명암 시인이 작사한 서귀포칠십리의 노래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서귀포칠십리의 가사가 간직하고 있는 이미지가,
당시 나라를 잃은 온 국민들에게 향수를 달래 주는 샘물이 되었고,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일깨우게 하는 지순한 공감대를 형성시켜주는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처럼 서귀포칠십리는 거리 개념이 아니라,
이 고장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있어서는 영원한 이상향으로서,
또한 서귀포를 잠시 떠나 다른 지방에 가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따뜻하고 아늑한 어머니의 품 속 같은 고향으로서,
이 고장 발전과 함께 시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질 것이라 봅니다.
● 서귀포칠십리 : 1679년 9월 11일. 점심을 의귀원에서 먹고 나서 달이 뜬 뒤에
정의현청으로 되돌아 왔다.
현에서 의귀까지는 30리이며, 의귀에서 서귀포까지는 40리가 된다.
도로는 바닷가로 뚫려 있어서 험하지 않았으나, 70리 길을 지나오는 동안에
의귀와 우둔(牛屯지금의 효돈)을 제외하고는
인적이 없고, 거친 새들만 들판 가득 끝이 없어 보였다.
북으로는 한라산이 남으로는 바다가 수평선까지 이어져 있어 가끔씩 수백 마리의
소말 떼가 풀을 뜯으며 지나가니,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이 아름답다.
- 午飯于衣貴院 東月而還 自官至衣貴三十里 自衣貴至西歸四十里 而路皆海無險處
所經七十里之間 除衣貴牛屯兩村外 絶無人烟 荒茅遍野 極望無際 北則漢岳撑空
南則大海接天 時見牛馬成屯 或至數百匹 擇水草豊茂處往來飮 若雲錦離披
〈출처 : 김성구, 『남천록』, 1697년 9월 11일 조)
24273
지난 날 "서귀포칠십리"의 발상지인 서귀포구의 야경입니다.
멀리
물마루 건너 갈치 낚시 떠난 주어등 불빛이 보이고
가까이로는 한치를 낚는 어부들의
손 그림자만
불빛을 달래고 있나 봅니다.
이 밤이 다하기 전
모항 서귀포로 돌아와
정낭 나려
기다리는 가족들의 눈빛인양
불빛에 흔들리는 주어등
가까이로 다가서는 한치 낚시선
밤 바람 따라
물마루 건너 가는
갈치 낚시선의 불빛 그림자
누군가에 의하여 기다리는
바다닷가의 긴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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