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임제사징령탑

相民 윤봉택 2010. 10. 15. 00:33

2010. 09. 26.(일)

 

임제사臨濟寺

임제사징령탑臨濟寺澄靈塔

 

첫째날(09. 25) : 북경 계대사

둘째날(09. 26) : 하북성 중심도시 석가장, 백림선사, 광혜사화탑

                       그리고 임제사 징령탑을 순례하였습니다.

 

임제사는 하북성 중심도시 석가장 정정현 성남쪽 임제촌에 있으며,

징령탑은 임제사 경내 초입에 있습니다.

청탑(靑塔) 또는 밀첨식탑이라 불리는 이 탑은 임제선사가 입멸하시자 제자들이

선사의 사리와 의발을 모아 모신 의발탑으로서 높이  33m의 8각9층전탑입니다.

 

이탑은 임제선사탑, 혜조징령탑(慧照澄靈塔), 의현선사탑(義玄禅師塔), 징령탑(澄靈塔)

령탑(靈塔), 당임제혜조징령탑(唐臨濟惠照澄靈塔) 등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임제사는 동위(東魏)나라 흥화2년(540)년에 창건되었으며,

당나라 대중8년(854)에 임제선사가 임제사 주지로 계실 때 임제선풍이 진작되었습니다.

 

이후 송과 금나라 전쟁 시에 건물과 탑이 많이 훼손되자,

금나라 대정 23년(1183) 세종(世宗)의 명에 의해 복구가 되었기 때문에

지금의 탑은 금나라 밀첩식건탑양식입니다.

,

임제사는 원나라 때 와서는 최고의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 지대2년(1309)에는 당대 최고 서예가인 조맹부가

무종의 명에 따라 임제정종비(臨濟正宗碑/임제사 중흥조 海云대사 관련)의 비문을 써 세우기도 했습니다.

 

명나라 정덕16년(1521)에 가람이 새롭게 중수되었으나,

명나라 말~청나라 초기에는 다시 황폐되는 인연이 있었지만 징령탑만큼은 화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47년 전후하여 가람이 많이 피폐되었고, 1985년에 와서 새롭게 건물들이 건축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 하북성의 중심도시 석가장은 참으로 불연이 깊은 땅인 것 같습니다.

6조혜능 이후, 당나라 때 중국 선종사의 큰 획을 놓으신 조주선사(778~897)와 임제선사(?~867)가

동시대에 석가장에 계시면서 선풍을 거양했으니 말입니다.

 

6조혜능선사 문하에는 남악회양과 청원행사라는 큰 스님이 배출되었고

남악회양 문하에서는 마조도일, 청원행사 문하에서는 석두희천이 배출됩니다.

 

마조도일 문하에서는 백장해회, 서당지장, 남전보원, 방거사등이 배출되며

백장해회 문하에서는 황벽희운, 서당지장 문하에서는 가지산문의 개조이신 도의원적,

남전보원 문하에서 조주종심이 배출됩니다.

 

황벽희운 문하에서는 임제종조이신 임제의현이 배출되는 데,

바로 이곳 임제사가 임제종풍의 발상지입니다.

 

 

 임제사 산문입니다. 현재 건물들은 1985년을 기점으로 중창된 건축물들입니다.

 가까운 륭흥사 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참으로 소박한 임제선사의 참뜻을 알 수 있는 도량입니다.

  임제사 현판글씨는 중국불교협회 회장과 중국불학원 원장을 역임하신  조박초(趙檏初)의 글씨입니다.

 불이(不二)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의미입니다.차별과 상대를 초월한 절대평등의 진리로서

 중도(中道)를 나타냅니다. 문수보살께서 찬탄하신바와 같이 유마거사의 불이법문과 같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고,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이 사람이 가장 소중한 나의 부처님입니다.

                        항상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이 정토(淨土)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설파하셨던 임제선사 . 

 임제사 대웅보전 이 또한 1985년에 중창된 건물 중 하나입니다.

 

 혜국큰스님께서 임제선사 징령탑 앞에서 임제선풍에 대하여 설파하고 계십니다.

 1947년 이전에 촬영된 임제사 징령탑과

 당시 건축물들이 훼손되기 전 사진입니다.

  1947년경에 훼손된 석비의 귀부입니다. 귀두와 함께 귀부가 1/3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임제의 제자들은 스님이 당나라 함통8년(867)4. 10일 대명부 흥화사에서 입적하시자 

  흥화사와 임제사에 각각 탑을 만들어 사리를 모셨습니다.

  그 후 송 금나라의 전쟁으로 가람과 탑이 많이 훼손되자 ,금나라 대정23년(1183) 세종(世宗)의 명에

  따라  징령탑을 복구(1185)하였기 때문에 현재의 탑은 금나라 밀첨식건탑양식입니다.

   1947년 당시에도 이 징령탑을 제외한 건조물들이 대부분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징령탑, 청탑, 밀첨식탑으로 불리는 8각9층의 징령탑은 전체 탑 높이가 33m입니다.

 탑 정면에 있는 진문(眞門) 홍예 위에는 전서체로 당임제혜조징령탑(唐臨濟慧照澄靈塔)이라 세겨 있습니다.

4면에는 이처럼 진문이 있고, 간방에는 광창을 뒀습니다. 

                                                     당임제혜조징령탑(唐臨濟慧照澄靈塔)

  탑의 기단부 지대석이 다른 그 어느탑보다도 높게 하였습니다. 이는 임제사가 평지형이기 때문에

 집중 호우 시 탑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 아닌가 봅니다.

 .

  탑 아래로 지대석을 두고, 하대부분은 벽돌을 쌓아 밭침을 하였으며,

  그 위 팔각면에 우주와 탱주를 두면서 안상에는 낙양모란과 새를 세겨 놓았으며,

  주심포 대좌위로 화려한 연화좌(수미단)를 쌓았고, 

  다시 그 위로 난간을 설치하여 장엄의 극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연화좌(수미단) 위의 1층 탑신입니다. 4면마다 각기 다른 진문을 세웠고,

 간방에는 광창을 달았는 데, 각기 문양이 다릅니다.

     좌측에 피뢰침에서 연결된 접지선이 지하부로 연결되어 있고

 연화좌를 받치는 두공으로 우주와 탱주에 각각 포를 넣어 외1출목의 다포양식입니다.

 연화좌 안상에는 모란과 새를 조각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낙양모란을 으뜸으로 여깁니다. 이는 중국 최초 여황제 측천무후가 아침에 일어나면 꽃을 볼 수 

 있도록 모든 화초에게 아침시간에 꽃을 피우라고 명령을 하였지만, 모란만 유독 꽃을 피우지 않았기에

 낙양으로 귀양을 보냈는데, 이 때부터 낙양모란이 유명하게 됐다는 전설이 있을만큼,

 중국에는 모란이 유명합니다.  

 연화좌를 받치는 두공 새이로 말벌이 둥지를 만들었습니다. 

  연화좌를 보호하는 난간 하방에는 만자(완자)와 아자교란을 넣어 장엄을 하였고,  

  그 위 상방에는, 당초문양 우측에 가릉빈가와 좌측에는 천마를 세겨 넣어

  삼겹으로 연화수미단을 꾸몄습니다.  

  온갖 당초문양이, 조각속의 우측 가릉빈가가 금방이라도 날아 오실듯 합니다.

 측변 간방에 전석편액이 있는데, 글자가 너무 마모되어 해독할 수가 없습니다.   

   수미단을 장엄하기 위해 3겹으로 연화를 두루면서 위 부분의 새이 마감은 연잎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수미단에 모셔진 9층 탑신이 참으로 웅대합니다만,

   탑 대부분이 그러하듯 1층 탑신을 넘어서면  2층 부터 상륜부까지는 유사한 모습이 반복됩니다.

   1층 탑신 사방으로 진문(眞門)있고, 다시 간방에는 광창에는 갖은 살을 넣어 장엄을 하였는 데,

   이 문들은 모두 가문(假門)입니다.

  창방 아래로는 연잎무늬를 놓았고 그 아래 간방에는 광창을 두어

  삼세인연이 모두 하나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진문 위 홍예 상부에는 좌우에 용을 세겨 여의보주를 향하게 하였고, 아래로는 연꽃 또는 모란으로 장식을

 하였습니다. 진문마다 저처럼 섬세한 문양으로 임제선사에 대한 예는 다함이 없었습니다.

 진문마다 같은 문양이 없습니다. 이 문의 홍예문양은 연꽃이 아닌, 모란 문양을 넣었습니다.

          좌측 진문의 홍예 마감문양은 모란, 우측 진문은 연화문양입니다.

 간방에 있는 광창은 가창(假窓)으로 창문틀을 삼중구조로 하여 창을 달아 놓았습니다.

  1층 탑신 위 처마 구조입니다.  사래 마구리에는 토수를 끼워넣었고, 그 위로 청색 신장상을 두었습니다.

  처마와 부연마다 풍탁이 걸려 있고, 수막새는 용문양으로, 암막새는 당초문양을 넣었습니다.

   각층의 출목도리마다 중심에는 동경(銅鏡)이 달려 있고, 1층에만 소로 하나에 좌우 첨차를 두었습니다.

            2층과 3층의 두공 구조가 다르며, 1층과 달리 풍탁(풍경) 또한 사래와 처마선에만 달았습니다.

사래 마구리의 토수 모습입니다. 토수는 추녀나 사래가 밖으로 길게 노출되기 때문에 부재의 부식을

 막기 위해 장치합니다만, 여기에서는 탑의 재료가 벽돌이기 때문에 장엄용으로 장식을 한 것입니다.

    임제선사의 징령탑은 9층전탑입니다. 이는 구품연화대의 극락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생활철학인 도교 입장에서 본다면, 하늘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하늘을 나타내는

    구천(九天)을 상징합니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련, 보병, 상륜, 원광, 보개, 앙월, 보주 등으로 조립되어 있습니다.  

         그믐달 빛의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 미물은 예서 무얼 기다려 서 있는지 . 喝..

         떠나 가라해도 떠나지 못하는 미물이여. '영도 정도 아니민' 저곁디 휴지통이라도 비웠으면 좋으련만 

     탑의 상륜부는, 1947년과 현재 모습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보아, 1985년 임제사가 새롭게 중창되면서

     징령탑 또한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이며, 사찰 조경 또한 백림선사와 달리 측백나무가 거의 없는 게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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