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건륭비정

相民 윤봉택 2012. 1. 28. 20:49

 

2010. 09. 26.

 

륭흥사(隆興寺) 건륭비정(乾隆碑亭),

   

첫째날(09. 25) : 북경 계대사

둘째날(09. 26) : 하북성 중심도시 석가장, 백림선사, 광혜사화탑

                       임제사 징령탑을 순례한 후

                       융흥사를 참배하면서 대비전 전면 우측에 세워진 건륭비정을 보았습니다.

 

륭흥사는 하북성 석가장 정정현 성 동쪽에 있는 사찰로서 가람 규모가 매우 큼니다.

그리고 대부분 건조물이 건립 당시의 양식으로 되어 있어 참으로 웅대하였습니다.

 

수나라 개황6년(586)에 용장사(龍藏寺)로 창건된 사찰은

송나라에 이르러 그 규모가 거대해졌으며, 이후 원. 명. 청나라를 거치면서

가람 중수가 이뤄졌고,

 

청나라 강희45년(1706)에 지금의 사명인 륭흥사(隆興寺. )로 사찰 명칭이 바뀌었는데,

거대한 청동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저 있어 대불사(大佛寺)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며,

융흥사라는 가람 명칭은 청나라 강희45년(1706) 강희황제가 융흥사라는 편액을 하사하면서부터입니다.

 

융흥사의 가람 배치는 남북 중심축에 주요 법당을, 중심측좌우로 요사와 정원을 조성하여 놓았습니다.

 

사찰 입구에는 석교가 있고, 천왕문, 대각육사전(大覺六師殿)터, 마니전(摩尼殿), 계단(戒壇),

우측에 자씨각(慈氏閣), 좌측에 전륜장각(轉輪藏閣),

좌측에 강희어비정(康熙禦碑亭), 우측에 건륭어비정(乾隆禦碑亭),

관세음보살입상을 모신 대비각(大悲閣), 대비각 우측에 어서루(御書樓),

북쪽에 미타전 등 주요 건축물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강희비는 1713년(강희 52)에 세워졌습니다.

대비각 전면 좌측과 우측에 각각 비각이 있는 데

건륭비는 좌측에 세워져 있습니다.

 

건륭제(乾隆帝1711년-1799는청나라의 제6대황제(1735-1796)입니다.

1735년(옹정 13년), 옹정제가 급사하자 저위비건법에 따라 황위에 올랐습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아 시와 서화를 즐겼고 각지의 시인과 화가들을 독려하면서,

특히 10년의 세월을 들여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여 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편찬 사업인

『사고전서』를 편찬함으로서 고서적들을 많이 발굴케 하였으나

문자의 옥도 단행하여 청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책들은 모두 금서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10차례에 걸친 정복 사업을 펼쳐 준가르와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티베트, 버마, 베트남, 네팔까지 진출하는 등 현재 중국 영토의 틀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내놓고

여기에 사치, 반란, 서방과의 부실한 외교, 그리고 희대의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화신을 20여년간 총애한 결과,

말년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나고 국고가 비어

결국 청나라가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 황제였습니다.

 

 

건륭제는 강희제의 손자입니다.

그러나 귀부는 조부의 강희비와 손색이 없습니다.

대비각 좌측에 세워져 있는 건륭비정입니다.

비신과 이수가 금방이라도 일어설 듯

 이수 중간에는 이 비가 누구인가를 밝혀주는 두번이 확연하고

 비신에는 한족어인 한자와 청나라 언어를 동시에 쓰여 있음이 이채롭습니다.

 

 

 

 

 

 

 

 

'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륭흥사 용장사비  (0) 2012.01.28
륭흥사 대비상비  (0) 2012.01.28
륭흥사 강희비  (0) 2012.01.08
륭흥사 대비각  (0) 2012.01.01
전륜장각  (0) 2011.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