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악인(樂人) 39명, 백제 악인 26명, 고려 악인 8명, 신라 악인 4명, 도라(탐라)악인 62명,
전체 139인 가운데 도라(탐라)악 출신자가 62명으로
아악료(雅樂寮)의 구성원 가운데
탐라 음악인 출신이 45%를 차지할 만큼 탐라국 음악이 대단하였습니다.
그 시절, 일본(제현. 축자) 무인(무용수)은 모두 28명 뿐,
당시, 당나라 악인(樂人)은 夏蕃인을 가리지 않고 맡아서 가르칠 만한 사람으로
백제, 고려 신라 등의 악인은 모두 當蕃인을 맡아서 배울만한 사람으로 선정하였으나
그러나, 도라(탐라)악인은
일본의 제현무와 축자무 같이
전문적인 연주와 무용이 가능한 악호(樂戶/전문가)에서 선정하였습니다.
서기 731년 당시, 탐라국 음악 전문가들 62인이
일본에게 탐라음악의 진수를 전하여 줬다는 역사 기록입니다.
이 때 부터 탐라 열풍이 일본에 전해졌기에
일본 음악 선율에는 당시, 제주인 들이 전수하여 준
선율이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감흥으로나마 느낄 수가 있는 것 입니다.
David Waterhouse,「Where Did Toraga Come From」(Musica Asiatica, London, 1991)
"필자는 일본 음악학자들이 도라악(度羅樂)의 근원에 대해 주장했던 다양한 이론들을 검토해 보았고,
도라악이 한국 남해안에서 떨어진 제주도에서 유래됐다고 파악하는
전통적 이론에 찬성할만한 이유가 있음을 입증하였다."(현행복, 번역문 옮김)
이와 같이 기록상으로만 보더라도 탐라음악 활동이 1282년이 되었는데도
혹자들은 제주음악의 원형이 뭍에서 전해졌다고 거렁청헌 소리들을 쉽게 합니다.
그리고
1653년 제주목사 이원진이 개간한 탐라지에 보면
당시에도 악공들을 전문적으로 교습시켰던 장춘원(藏春院)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악공들은 조정에서 보내온 교서를 받거나
또는 조정에 전문을 보낼 때 일정한 의례에 따라
연주를 하였습니다.
耽羅誌 宮室(條) 藏春院 在新果園西卽 妓工習樂之敎 坊樂工以官奴擇㝎 無㝎數 用於迎敎拜箋望闕禮 所闕非細 妓生以官奴有才貌者陛之冝精擇 장춘원은 신과원 서쪽에 있다. 기생이나 악공들이 음악을 배우는 곳이다. 악공은 관의 노비에서 골라 뽑았으나, 정원은 없다. 이들은 교서를 받거나 또는 전문을 올릴 때, 악공들이 연주하였지만, 이에 대한 것은 자세하지 않다. 기생은 관의 노비에서 재주가 있고 용모가 있는 자 가운데에서 뽑았다
이러한 자료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일부 명사들은
탐라의 전통음악성을 무시하고 뭍에서 전래되었다고 난리입니다.
일례를 들자면
농악도 그렇고, 민요도 그렇다며 뭐든지 뭍과 연결하려 합니다.
만약 그들의 주장이 맞는다면, 제주음악이나 농악은 19세기를 시점으로 적용해야 맞을 것입니다.
한 때, 신라에서는 당시 신라 주변을 위협하고 있는 구한(九韓)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고자 하여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워 구한의 위세를 억누르고자 하였는데
담라(탐라국)은 구한의 하나로서 신라를 위협할 만큼 세력이 대단하였으나,
※ 신라의 주변 국가로 추정되는 아홉 개의 국가 : 일본, 중화, 오월(吳越), 탁라(托羅/탐라), 응유(鷹遊/백제), 말갈(靺鞨),
단국(丹國/거란), 여적(女狄/여진), 예맥(濊貊)
1105년 탐라국 천년 시대가 강제로 고려에 예속되면서
탐라국은 탐라군, 탐라현으로 강등 되다가 1211년 제주(濟州)로 불려진 이래
탐라는 뭍사람들에 있어서는 물 건너(濟)에 있는 섬(州)으로만 기록되었습니다.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삼별초가 평정된 후 원나라에 의해 탐라총관부가 설치되었고,
1374년 최영에 의해 목호가 토벌될 때 까지 탐라는 102년간 원에 예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항몽에 대한 결연한 탐라국인들에 의한 의지는 계속되었습니다.
때론, 호국삼부경의 하나인 『금광명경 문구』를 팔만대장경과 같은 판형으로
1296년, 애월 광령리에 있는 묘련사에서 목판에 새겨 인출 보급함으로서 항몽의 의지를 나타내기도 하였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