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17
1996년 천지연 입구에 세워진 시인 小雲 김광협 선생님의 시비
▲ 1990년 두번째 자선집 『유자꽃 마을』에 있는 자화상
▲ 1992년 두번째 번역시집이자 마지막 저서였던 『투르게네프 산문시』에 김광협 시인의 캐리커쳐(김성인 作)
▲ 1983년 첫번째 자선시집『황소와 탱크』에 있는 김광협 시인(동아일보 기자 시절)
1991. 5. 4. 산방산 주차장에서 김광협 선생님과 함께 윤봉택
1991. 5. 4. 중문관광단지 여미지식물원에서 김광협 선생님과 함께 윤봉택
1991. 5. 4. 산방산 주차장에서 김광협 선생님
1991. 5. 4. 중문관광단지 내 신라호텔에서 김광협 선생님과 함께 윤봉택
1991. 5. 4. 영실 오백나한 주차장에서 김광협 선생님과 함께
1993. 7. 7. 영결식 후.
앉은 자세 좌; 강통원. 정인수. 이00. 강문신. 윤봉택
2열; 000. 000. 김순남. 한천민. 고명호. 오승철. 고정국
3열; 현기영 교수.
-1996년 시비 건립 후.
시인 김광협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1991년 한라일보 시 부문 ‘제주 바람“이 당선되면서 부터이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김시태. 김광협 두 분 선생님을 당선 된 후 서울로 찾아뵈면서 처음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1990년 12월 18일 밤 11시경 전화기로 투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봉택씨 집 맞지요. 아 ~ 한라일보에 시 제주바람을 응모했습니까?
아 ~ 나 김광협이란 시인인데 나 알아요?"
’모릅니다.‘ ”아니 내가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는 시인 김광협이야“
’예 사투리 시 연재되는 거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 지금 막 신춘문예 시 부분 심사를 김시태 선생과 함께 마쳤는데,
당신 시 제주바람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고서, 기분 좋게 막 소주 한잔하며 윤시인한데 전화하는 거야“
라며, 선생님으로부터 난생 처음 시인이라는 호칭을 들었다.
벌써 24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는걸 어쩌랴.
선생님은 당시 제주인 으로서 서울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그러면서 나는 틈틈이 강남구 역삼동 773-10호 자택으로 찾아뵈었고
선생님께서는 제주문학과 중앙문단 그리고 문학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1991년 하반기부터는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 서귀포 토평동 자택에 자주 내려 오셨다.
선생께서는 내려오시기 전부터 미리 전화를 하면서 자리회 얘기를 빠트리지 않으셨다.
초등학교 동창 중에는 오홍식(전 감협조합장)님을 자주 만났었고,
문인들은 김용길, 한기팔 시인들과 연락을 자주하곤 하셨다.
선생은 시간날 때 마다 옛 추억이 깃든 곳 찾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것도 혼자서가 아니라 반드시 아버님과 함께 하셨다.
그러면 차에 두 부자를 모시고 신효 월라봉, 보목리 바닷가, 검은여, 자구리를 지나,
법환동 현주하 시인 댁에서 자리회를 얻어먹고 강정 바다에 가서 바릇을 잡다가
산방산을 지나 영실 등을 거치는 나들이를 참으로 좋아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당신의 운명을 짐작하셨던 것 같다.
하루는 염돈마을 운랑천을 찾았는데,
당신의 자호가 왜 소운小雲인지를 설명하였다.
자호에 구름雲자를 넣기는 해야 하겠는데,
아버님 함자가 南雲이라서 이미 구름雲자가 들어갔기 때문에,
아버님은 남쪽 구름, 당신은 그 뒤를 따르는 작은 구름이라는 의미로 소운小雲이라고 하였다고 했다.
선생님께서 나에게 당신 저서를 주실 때도 반드시 낙관에 이름과 小雲이라는 호를 따로 하여 주셨다.
그리고 하루는 나에게
‘윤시인 어제 말이야, 한기팔 형님이 오셔서 나에게 시화전 한다고 하면서 낙관을 찍어 달라고 했어,
그런데 전부 서울에 두고 왔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내가 작품을 다른 방으로 갖고 가서
라이터 밑 부분에 인주를 묻혀서 딱 찍어서 드렸는데, 아무 모르실거야. 재밌지…….’라며 해박한 웃음을 짓기도 하셨다.
분명한 것은 서울에 그렇게 오래 사셨으면 서울말에 꽤 익숙했을 법도 한데,
제주인 들과 대화 시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제주어만을 고집스럽게 사용하셨다.
선생께서는
‘내가 정식으로 심사해서 등단시킨 시인은 윤봉택 시인이 처음이야,
그러니까 항상 문학을 함에 있어
작품에는 그 시대의 역사와 실존, 아픔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하시면서 詩作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주문하셨다.
선생님이 서귀포에 내려 오실 때가 되면 서울 사모님은 비상이다.
술에 대한 당부가 이만 저만이 아니셨다.
아무리 술을 숨겨놔도 술을 찾아서 잡수시니,
서귀포에 가면 윤시인이 선생님 곁을 한시도 떠나지 말고 술을 잡수지 않도록 단단히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내려오시면 나는 먼저 선생님 방과 주변을 모두 살펴 술이 있으면 모두 치워버리곤 했다.
그러면 선생께서는 “아니 윤시인 그거랑 호썰 내부러게,
하영 먹는것도 아니고 호썰만 목 축이는 것도 아니되여. 그거랑 내부러게.”라고 하시면서,
음료수 병에 몰래 술을 담아서 마시곤 했을 만큼 선생께서는 술을 가까이 하셨는데,
이는 분명 척박한 서울 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자신만의 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인 김광협은 1941. 8. 6(음 6. 14)
서귀포시 호근동 1851번지 조부모님 댁에서
아버지 김남운 어머니 김사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본은 광산이며, 자호는 소운小雲이다.
태어난 이듬해에 아버지가 당시 경성대학 부속 생양연구소에 취직하게 되자,
아버지 따라 가족들이 토평동 관사로 이사를 하게 된다.
4살 대 석주명 박사가 나비 잡는 모습을 보았고,
부친에게 천자문을 읽힌 다음,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다시 호근동 조부모 댁으로 가서 서호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하였다.
11세가 되던 1951년 43사건으로 외갓집 신효동으로 내려와서 살다가
1953년 서귀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는 다시 토평동으로 가서 살았다.
1956년 16세 서귀농림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거기에서 국어교사 강군황 선생을 만나 문학 지도를 받았다.
교내 백일장에 수필 등으로 장원을 하는 등 창작 활동을 하면서
1957년 17세 때 제1회 한라예술제 백일장에서 시 “천지연”으로 장원을 하였다.
이후 1959년 19세에 서울대학교 사법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하면서
계속 창작활동을 하였다.
김광협 시인은
서귀포가 낳은 이 시대의 최고의 시인이자 서귀포시의 최초 시인이다.
한라산 남쪽 즉,
서귀포시에서 처음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서귀포시에서는 처음으로
1963년 월간 교양잡지 "신세계" 공모 제1회 신인상 시 부문에서
'빙하를 위한 시'가 박두진 심사에 의해 당선 등단하셨고,
1965년 신춘문예에 그것도 동아일보에 시로 당선되셨다.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제주인 으로서는 처음으로 수도 서울에서 문인으로 대성하여,
제주출신 문인으로서는 1981년 약관 41세에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하셨다.
약관 23세에 월간 종합교양잡지 『신세계』에서 공모한 제1회 신인상 시부분에
‘빙하를 위한 시’가 박두진 선생의 심사로 당선되어 문단에 첫 발자국을 내딛기 까지는
1956년 서귀농림고등학교(현 서귀과학고) 국어 교사 姜君璜 선생의 지도가 있었다고 시집 『황소와 탱크』 연보에서 밝히고 있다.
시인 박두진 선생은 김광협 시인의 첫 시집 『강설기』 서문에서
“시를 쓰는 사람 중에는 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쓰는 사람과,
시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쓰는 사람과,
시가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를 초월하는 차원에서 쓰는 사람의 세 부류가 있다.”고하면서,
“김광협 시인은 ”시가 무엇인지 보다는 시가 어떠한 것인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인지를 잘 알고 쓰는 시인임이 분명하다. “고 하였다.
그리고 한기팔 시인은 시인 김광협 선생을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떠나는 시인’이라고 하였다.
소설가 현길언 선생은 김광협 시인과의 사반세기 우정에서
”그의 기질은 아름다운 서귀포의 자연과 감귤꽃 향취에 취하여 땅에 순응하고 하늘만 쳐다보며 사는 온유한 모습만은 아니었다.
바람과 돌짝밭과 파도에 닳고 닳은 심장과 무쇠같이 탄탄한 팔뚝으로 자연과 싸우면서 살아온 힘 있는 농부의 정서였다.
그것은 배반을 용납하지 않고, 정직을 훼손하는 모든 상황을 묵과하지 못하는 논리를 세워 주었다.
그의 詩作과 기자생활을 관류했던 하나의 철학은 바로 거기에서 연유되었다. “고 하였다.
약관 50세에 이르러서는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가끔 고향에 내려오시면 음료수 병에 몰래 술을 담아서 마시곤 할만큼
선생께서는 술을 가까이 하셨는데,
이는 분명 척박한 서울 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자신만의 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육신이 병마에 지쳐가면서도 선생께서는
1991년 번역시집 『아메리칸 인디언 청년시집』,을 병상에서 번역 발간하셨고,
1992년 제6시집 『산촌서정』, 번역시집 『투르게네프 산문시』 또한 병상에서 발간하셨다.
이후 1993년 7월 5일 강남성모병원에서 숙환으로 53세 젊은 나이로 영면하셨으며
선생님을 서귀포로 운구하여
7월 7일 선영에서 서귀포문학회 주관으로 전 회원들의 뜻을 모아
서귀포문학사에서는 최초로 서귀포문학회장을 엄수하였다.
1995년에는 김광협 시인 시비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1996년 시인 김광협 선생이 詩 천지연에서 밝힌바와 같이
“이제 / 너를 닮아 / 살겠다던 소년, / 天地淵 / 네 곁에 영원히 살으리라.”처럼
천지연 입구에 ‘유자꽃 피는 마을“의 김광협 시비가 세워졌는데, 이 또한 서귀포에서는 최초의 詩碑이다.
김광협 문학연보
1941. 8. 6. 서귀포시 호근동 1851번지에서 출생(부 김남운. 모 김사열)
1948. 서호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
1953. 서귀중학교 입학. 국어교사 玄敬元 선생의 영향으로 처음 문학에 흥미를 가짐.
1956. 서귀농림고등학교 농학과 입학, 국어교사 강군황 선생의 문학 지도를 받음.
1957. 제1회 한라예술제 백일장 시(천지연) 장원
1959. 서울대학교 사법대학 국어교육과 입학. 작품 활동함
1963. 23세. 월간종합교양지『신세계』 제1회 신인상 시(빙하를 위한 시) 당선(심사 박두진)
196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강설기) 당선(심사
1961. 『詩學』도인에 참가(권오윤. 이성부. 이탄. 최하림)
1969. 29세 부애숙과 결혼
1970. 월간문학 6월호에 ‘유자꽃 피는 마을’발표
1970. 첫 시집 『강설기』 발간
1971. ‘폐습’ 연재 중에 필화 사건에 말려듦
1973. 제2시집 『천파만파』 발간
1974. 34세. 현대문학상 수상
1976. 36세. 동인지『詩文章』 창간(강우식. 강은교. 권오윤. 신중신. 이성부. 정진규. 조창환)
1981. 41세 제3시집 『농민』 발간
1981.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1983. 자선시집 『황소와 탱크』 발간
1983. 제4시집 『예성강곡』 발간
1984. 제5시집 『돌하으방 어디 감수광』 발간
1990. 50세. 자선시집 『유자꽃 마을』 발간
1991. 번역시집 『아메리칸 인디언 청년시집』 발간
1992. 제6시집 『사촌서정』 발간
1992. 번역시집 『투르게네프 산문시』발간
1993. 7. 5. 53세. 서울성모병원에서 지병으로 영면
1993. 7. 7. 서귀포문학회장으로 엄수, 호근리 학수바위 선영에 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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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 地 淵*
네 이름
天地淵,
칠십여척 흰 무명폭.
이끼 푸른 바위,
연두빛 고사리.
사철 너를 닮아 사는
상록수들.
밤이면
초롱초롱 빛나는 성좌 함께
「릴케」의 싯귀는
네 마음 따라 읊어지겠다.
쪽빛
넓디넓은 바다
大洋을 볼 수 있다기
저리도 네 심장은 또
뛰고만 있느냐?
이제
너를 닮아
살겠다던 소년,
天地淵,
네 곁에 영원히 살으리라.
〈제1회「漢拏예술제」 백일장 장원 당선작 1957. 10〉
- 당시 김광협 선생 나이 17세, 서귀농고 1학년 재학중
* 김광협 첫시집 『降雪期』 , 현대문학사, 1970.
* 시집에 게재된 그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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氷下를 위한 詩*
Ⅰ
表層에 달무리를 뿜으며
무겁게 눈가루가 圓舞한다.
奸臣이 자신의 胸圍를 孤獨으로 재듯
밤 눈 속에 깔려오는 忍從의 倫理,
나는 먼 山 둘레에 서 있는다.
조그만 拒否도 魂에 상처를 주고
몇 남은 환상의 葉柄에도 잇자죽을 베푼다.
골짜기마다 찬란한 疾患이 씻어가고
바람을 타는 凝結이 조용히 體積을 숨쉰다.
남은 마음은, 전갈로
뜨거운 恩寵이 조찰히 덮여오기를 熱望한다.
하지만 나는 종내 먼 거리에서
氷下의 表層을 사랑하는 간곡한 뜻,
채 식기 전의 나무 둘레에 숨쉬는 다수움을
한아름 웃음짓으로 호젓이 껴안아 보인다.
그 나무 가으로 돌음 돌아
原始가 사무치게 농울져 불려가고
속 출렁이는 푸른 母國語도
誕生을 못 보는 서룬 불씨를 흩는다.
결국 氷盤에 머물은 나의 思惟는
무슨 뜻 있는 證言을 기약하고 있을까?
Ⅱ
나의 몸 언저리에 무에 자꾸 와 부딪는다.
오, 빈곤한 木管樂器의 소리라도 있으면
전에 없이 살찐 땅처럼 愛着이 눈뜨리라.
산 둘레는 갑자기 힘나는 눈빛을 머금으고
묻혔던 爬蟲類와 그밖의 짐승들
꽃나무와 灌木데미 촘촘히 들어와 서리라.
조금한 慰撫와 기쁨에
푸르므레 새로운 生成의 미소가
죽어있는 氷下에 先史의 몸짓으로 스며 들리라.
Ⅲ
靜謐이 浴女처럼 찰삭이며 氷下에 몸을 씻는다.
暖帶에서 자란 宇宙가 浴女와 희롱는다.
不貞한 피가 눈썹에 사롱사롱 맺힌다.
스사로운 정분에 서로의 몸을 둔다.
무슨 우렷한 神意의 慾情이라도 돋아오는 것일까?
Ⅳ
낯짝과 몸 언저리에 부딪는
선연한 색깔의 핏줄을 타는 神明
불 밝히듯 호걸스런 證言이 어른어른 살아온다.
머릿발에 서린 구름 층을 금 가르며
흰색 餞別이 바람결에 재게 날은다.
髑髏도 일어나 바랜 拇指를 빛낼만큼
꿈의 무리가 춤을 추며 이리로 온다.
氷下는 그 깊이에서
훠이훠이 오로라의 꿈을 타고
엇가르며 부르는 소리 울림가락을 보낸다.
오래 그리워하며 사랑하던
한뼘의 地表를 빰 부비게 한다.
사랑과 그리움으로 모서리진
한뼘의 두던을 가운데 놓고도
숨결이 안 닿는 未熟의 수집음,
나는 山 둘레를 돌아 내린다.
내 얼굴이 함뿍 즐거움으로 물든다.
가슴 속에서 金色의 씨앗과 풀빛의 花甁이
와아와아 웃는 소리를 듣는다.
短詩를 외이며 고향으로나 돌아가듯
가벼운 마음이 氷下에 熱望의 씨를 멕힌다.
이제는 잊혀진 이야기를 찾아
사시장철 온갖 데를 헤매일까.
오늘 나의 宇宙는
最上의 아름다운 임의 옆모습.
〈1963. 7/「新世界」 1963. 9. 제1회 신인문학상 당선작·選者 朴斗鎭〉
* 김광협 제2시집 『千波萬波』 , 현대문학사, 1973.
* 시집에 게재된 그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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降 雪 期*
눈은 숲의 어린 가지에 흰 깁을 내린다.
「프로스트」氏도 이제는 말을 몰고 돌아가버리었다.
밤은 숲의 어린 가지에 내려온 흰 깁을 빨아 먹는다.
흰 깁은 밤의 머리를 싸맨다.
설레이던 바람도 잠을 청하는 시간, 나는 엿듣는다.
눈이 숲의 어린 손목을 잡아 흔드는 것을,
숲의 깡마른 볼에 입맞추는 것을,
저 잔잔하게 흐르는 愛情의 日月을,
캄캄한 오밤의 푸른 薄明을,
내 아가의 無量의 목숨을 엿듣는다.
뭇 嬰兒들이 燈을 키어들고 바자니는 소리를,
씩씩거리며 어디엔가 매달려 젖 빠는 소리를,
나는 엿듣는다.
숲 가에서 나는 너의 두개의 乳齒를 기억한다.
너의 靈魂이 잠시 地上에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너의 다수운 입김이 아침의 이슬로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生命의 빛이 너의 눈동자에 가득차 있었음을 기억한다.
너의 손을 내저어 大氣를 흔들었음을 기억한다.
비록 부둥켜 안아 너의 步行을 연습시키었을지라도
너의 발을 디뎌 地球를 느끼었음을 기억한다.
너의 言語는 無에 가까웠을지라도 體得의 言語였으며,
너의 思索은 虛에 이웃했을지라도
血肉을 感知하는 높은 慧智였음을 기억한다.
잃어버린 모든 기억들을 나는 想起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상기 단 한가지 罪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숲 가에서 나는 너의 두 개의 乳齒를 기억한다.
눈은 숲의 어린 가지에 흰 깁을 내린다.
내리어라 내리어라 내리어라.
밤이 눈의 흰 깁을 빨아먹더라도
그의 이마에서 발 끝까지 와서 덮이어라.
溫柔의 性稟으로 사픗사픗 내려오는 숲의 母性이여.
숲은 내 아기의 變貌.
곁에 서면 歲月이 머리를 쓰다듬는 소리
歷史가 裝身具를 푸는 소리들,
시름에 젖은 音節로 되어
꽃잎처럼 흩어져 기어다닌다.
괴괴한 이 밤의 얼어붙은 支流에서
서성이는 나의 涕泣, 나의 기쁨.
내가 내 자신과 내 아가와 내 人類에게 가까이 돌아가는
淸澄하고 힘 있는 내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想起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상기 단 한가지 罪의 의미를 모른다.
내 숲이여, 내 아가야, 내 자신이여, 내 人類여.
나는 참으로 단 한가지 罪의 의미를 모른다.
〈「동아일보」 1965. 1. 1 신춘문예 현상 당선작〉
* 김광협 첫시집 『降雪期』 , 현대문학사, 1970.
* 시집에 게재된 그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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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꽃 피는 마을*
내 소년의 마을엔
유자꽃이 하이얗게 피더이다.
유자꽃 꽃잎 새이로
파아란 바다가 촐랑이고,
바다 위론 똑딱선이 미끄러지더이다.
툇마루 위에 유자꽃 꽃잎인듯
백발을 인 조모님은 조을고
내 소년도 오롯 잠이 들면,
보오보오 연락선의 노래조차도
갈매기들의 나래에 묻어
이 마을에 오더이다.
보오보오 연락선이 한소절 울 때마다
떨어지는 유자꽃.
유자꽃 꽃잎이 울고만 싶더이다.
유자꽃 꽃잎이 섧기만 하더이다.
〈월간문학 1970. 6〉
* 김광협 첫시집 『降雪期』, 현대문학사, 1970.
* 시집에 게재된 그대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