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12.
김성열 시인 월평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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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 - 2015. 10.
시어의 존재성과 사물성
시가 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하고 언어는 쓰이는 조건에 따라 거기에 맞는 용법을 갖는다. 시인은 언어를 잘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진정한 시다운 시를 창작 할 수 있다. 시인의 내면공간을 시적 언어로 잘 형상화해야 하는 것이다. 형상화의 수단, 즉 표현 매체로 삼는 것이 언어이고, 언어의 충분한 이해 없이는 시의 깊은 이해나 창작은 기대해 볼 수 없게 된다.
언어의 쓰임새에 따라 (1) 과학적 용법에 의한 언어. (2) 정서적 용법에 의한 언어로 구별 지운 사람은 리처즈이다. (1)의 경우 대상을 정확하게 표현, 지시, 전달하는 용법이며,( 2)는 얼마나 효과적으로 정서를 빚어낼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쓰이는 용법이다. 시인이 쓰는 언어는 물론 정서적 용법의 언어이다. 정서적 용법의 언어를 우리는 시적언어(시어)라고 말한다.
시적 언어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시(또는 시어)의 존재성과 사물성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 시어의 특성으로는 함축성, 애매성, 개성적 문체 등을 포함 할 수 있지만 존재성과 사물성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더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하겠다.
1. 시가 왜 의미하지 않고 존재차원을 지향 하는가?
2.시가 왜 사물로 규정되는가?
이러한 두 가지 질문에 육화 된 답을 갖는 시인이 진정한 시인으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사용한 언어는 일반적인(과학적인, 사전적인)언어의 제약을 벗어나 사물 그 자체이고자 한다. 시어는 의미차원이 아니라 존재차원을 지향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의 언어는 사상, 관념, 의미내용에 봉사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러한 내용을 이용하고 자양분으로 삼아 감정이나 정서를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노래한다. 그리하여 일단 시가 되는 순간 그 언어는 사상이나 관념, 사전적 의미와는 무관한 제 3의 실체가 되어 그 존재성을 확보하게 된다.
정서적 용법에 의한 시적 언어가 제 3의 실체로 존재하면서 하나의 사물이 된다. 여기서 시어의 사물성이란 한 시대의 전통과 인습으로부터 독립된 의미내용을 갖는 사물이다. 화가가매체로 삼는 색채와 선, 조각가의 돌이나 쇠붙이, 작곡가의 오선지와음부 등은 예술품을 완성하기 위한 매체(수단, 소재)이지 작품 자체는 아니다. 시의 언어 역시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기호는 아니다. 시적 언어는 문자 그대로의 순수한 상태를 가리키지 않고 감각으로 존재하면서 느낌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 느낌의 세계가 바로 색채나 음향의 상태이며 그 세계는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다른 의미내용(상식과 과학적 의미)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언어의 상태를 시어의 사물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시의 언어가 사물이 되는 순간 그 작품 전체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실체가 되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존재의 시”라고 부른다. 존재의 시에서는 대상을 의미내용으로 한정시키지 않고 무한한 개방성을 유지하여 우리에게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1.시는 하나의 감각적 실체 자체이다.
2. 시어는 외부의 대상을 명명(命名)하는 언어가 아니다.
3.시인은 명명되지 않는 상태의 대상(무의미)과 갈등하며 진동상태에 존재하는 독특한 인간이다.
4.시는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제 3의 실체일 뿐이다.
5.시가 의미하는 차원을 극복하고자 했을 때 그것은 존재가 된다.
6. 사물로서의 언어가 존재론적 시를 만들며 시의 존재론 상의 의미를 갖는다
전술한 바와 같이 시어의 특성으로 애매성, 함축성, 개성적 문체 그리고 사물성과 존재성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평자는 장황한 시론 강의 의도가 없다. 문예사조 8.9월호에 게재된 시작품 중에서 주목되는 바, 눈길이 가는 시를 이야기 하는 전제로 삼고 있을 뿐이다.
산사(山寺)의 신선한
/ 내음으로 /
소리로 /
움직임으로 온 것인데
// 하늘과 땅
/ 서로 부등켜
/ 파아란 하늘은
/ 이파리에 덧칠된다
// 연못에 계시다는
/ 그 부처님은 출타 중
// 돌아서서 바라보니
/ 내 마음 안 호수에
/ 빙긋이 들어 계신 것을.
박철용 시 “불영계곡(佛影溪谷)” 전문 ㅡ문예사조 8월호
이 시를 슬로비디오 보듯, 위 내시경을 보듯 침착하게 해부해 보자.
불영계곡이라는 고유명사의 한 지점에서 산사의 주변을 둘러 싼 신록의 내음과 속삭이듯 사운대는 음향(音響)을 동적인 상태로 감지하는 시인의 내면과, 하늘과 땅이 부등켜안고 딩구는 사이에 파란 하늘빛이 이파리에 덧칠되어 푸른 숲을 이룬다는 시각적 이미지를 전제로 한 연못과 부처님...출타 중인 부처님은 왜 돌아오지 않고 보이질 않는 것일까. (묵상의 시간이 지나고) ...많은 욕심과 부질없는 허욕을 버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계곡을 다시 보는 시점에서 시인의 마음은 청정한 호수가 되어 그 호수의 수면을 뚫고 솟아오른 웃음 짓는 부처와 만난다는 것이다. 이 시의 분석과 감상이 여기에서 끝인다면 평범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3연과 4연에 있다. 연못에 계신다는 부처님과 마음 안의 호수는 1, 2연의 자연 환경과 연관을 맺고 무대 공간의 비약적 확장을 통하여 현실세계를 벗어난 초월의 경지(세계)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가 빚어낸 초월의 세계는 과학적 언어로 해석되지 못하고 정서적 용법의 시적 언어로 해석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세계도 아니며, 분명한 판단도 불가능한 새로운 사물로 창조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시의 존재는 제 3의 실체가 되고 사물성과 존재성을 획득한다. 박철용 시에서의 사물성은 감촉되는 자연의 역동성과 마음의 호수에서 일렁이는 상징적인 부처상의 시적 구상화다.
박철용 시의 가능성은 절제된 언어의 함축미다. 좋은 시를 또 기대 한다.
모든 만물이 결실을 맺는 계절
/ 길가에 핀 코스모스도
/ 서둘러 꽃을 피우려 하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내 나이 49세
/ 어느 세월에 그림자 같은 그림자를 만나
/ 언제 사랑의 결실을 맺으려나
// 올 가을도 소리 없이 왔다
/ 내 마음에 허전함만 남기고 / 말없이 가려나 보다.
채성숙 시“가을” 전문 -문예사조 8월호
시인의 순수한 개성은 아름답다. 시인의 개성은 창조이며, 순수함은 계산없는 공감을 일으켜 감동을 수반한다. 채성숙의 시에서 개성적인 순수미를 읽을 수 있다. 어른이 속삭이는
동심의 절규 같은 울림을 주는 순수함이다. 이 시의공간에는 여백이 넓지만 그려진 그림은
선명하다. 뭉툭뭉툭 강조된 덩어리가 메주덩이처럼 드세게 자기 주관적이다.
본문을 보자. 만물이 결실을 맺는 계절에 뒤늦게 꽃을 피우려는 길가의 코스모스가 시적 화자와 만난다. 49세의 어린애 같은 마음의 그림자- 그것은 사랑이며 희구(希求)이다. 올 가을도 소리 없이 왔다가 허전한 공허만 남기고 말없이 가려나 보다. 이상의 부연 내용에서
너무도 단순한 소박함을 접하게 되는데 이 단순 소박함에서 타인이 범접 못할 고상한 순결의 경지가 오붓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여인이 자신의 나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냄은 일반적인 문화 전통에 반하는 용기이며 순수한 자기 노출의 예술혼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개성적이며 창조적이다. 세속적이며, 위선적인 자기과시를 거역하는 당당한 떳떳함이다. 천상병의 “땅”이란 시를 보면- 나도 땅을 가지고 싶다/내가 좋아하는 민병하 선생님도/수원 근처에 오천평이나 가졌는데(......) 싼 땅이라도 좋으니 한 평이라도 땅을 가지고 싶다//땅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좋으랴......(......) 땅을 가지고 있으면 초목을 가꾸고/꽃을 심겠다.
이러한 천진스런 시적 발화가 천상병만이 갖는 시의 개성이며 사물성이다. 채성숙의 시에서천상병스런 순수 무구한 자기 드러냄의 시를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머언 구름에도
/ 그리움이 남아 있어
/ 그 산이 / 쉼터가 되듯
// 속살 깊은 해류에도
/ 아림이 있어
/ 그 섬이 / 계선주가 되듯
// 삭정이 된 옹이에도
/ 동살이 남아
/ 있는 것을
// 왜 바람으로만 불어
/ 오시는가.
윤봉택 시 “끝나지 않는 이야기· 14”전문 -문예사조 9월호
-삭정이
윤봉택의 시에서 주목되는 점은 표현상의 애매한 함축성이다.
애매하다는 것은 해석의 여지가 없는 난해성과는 다른 의미다.
해석의 여지를 넓고 깊게 포괄하는 함축적인 깊이가 있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1연에서 머언 구름에도 그리움이 남아 있어/ 그 산이 쉼터가 되듯...여기에서 생각해 볼 것은 구름과 그리움, 산과 쉼터의 관련 연상(聯想)이다. 구름은 허공을 떠돌아 미궁의 이상을 그리면서 피어나는 심상일 것이고, 산은 성장체험을 품어 안고 묵언정진하는 청빈낙도의 평안을 주는 쉼터로 읽어낼 수 있거니와 그 외에 수 많은 의미와 사연을 풀어낼 수 있는 상상적 여지를 포함하고 있다.
2연에서 속살 깊은 해류에의“아림”이란 무슨 아림인가. 그 섬이 계선주가 된다는 점이 “아림”과 관련되어 더 많은 상상을 집결시킨다. 뱃사람들의 애환과 삶과 떼죽음의 비극적인 사연도 떠올리게 한다. 그 섬이 배를 매는 계선주가 된다는 일은 섬사람들의 숙명적인 저주의 표상일 것이다.
3연의 “삭정이 된 옹이에 동살이 남아”라는 표현은 압축된 의미가 멀고도 깊다. 삭정이와 옹이는 시간적으로 오래이고 가시적으로 아픔이 많은 상처이다. 여기에 동살이 남아 비애스러운 화자의 정서를 그나마 달래주고 있다. 끝 연에서의 “바람”은 모진 삶의 시련으로 읽혀지면서 끝나지 않는 윤봉택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다.
이 시인은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시와 함께 살아오면서 수준 높은 시를 많이 써 온 문예사조가 자랑할 만한 중진이다. 이런 훌륭한 시인을 배출한 문예사조는 그 역사만큼이나 밝게 빛나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얼굴만 보아도 누구나 다 아는 그는 선수다 //
벌써 오래 전부터 오늘까지 그의 실력을 우리는 알고 있는 터이다 / 국내 무대는 물론
국제무대에서 그의 실력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 출전만 하면 그는 애국가를 들려 주었다/
그는 항상 물에서 살았다
/ 엊그제 목에 금메달을 걸고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 인터뷰를 하던 모습이 국내외로 방영되었는데......
/ 오늘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망 뉴스를 들었다
/ 출발선에서 뛰어든 그가 끝내 나타나지 않고
/ 경기 종료 후에 물 위에 떠올랐다는 것이다
// 그래서 이제는
/ 그의 움직이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전홍구 시 “빠져 죽다” 전문 -문예사조 9월호
전홍구의 시에서 주목되는 바는 세상을 보는 비판적 시선이다. 시인이 살고 있는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며, 무슨 해석을 하는지는 시인의 개성이나 시정신과 관련이 깊다. 수동적인
태도로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운명형의 사람과 능동적으로 현실에 저항하면서 공격적 태도를 취하는 인간형도 있다. 전홍구 시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후자의 경우이다. 그동안 5년여 기간의 연재시를 줄 곳 관망해 오면서 동아줄 같이 굵직한 시의 맥락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시대에 능동적으로 맞서는 저항의식과 풍자적 시풍이다. 엉뚱하게 생경한 화제로
주위를 싸늘하게 만드는 그의 평소 화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생각나게 하는 추억 같은 여운을 남긴다. 그의 시도 그렇다는 것이다.
예시한 전홍구의 시에서도 그러한 면면이 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 시에 대한 구질구질한
해석이나 분석은 부질없다. 간단하게 말해서 “시대의 풍자시”라고 하면 되지 싶다.
알만한 유명 수영선수가 물에 빠져 죽다니- 그것도 만인 환시리의 수영 경기장에서-
아이론이칼 하고 역설적이다. 이 시의 내용이 암시하는 바는 시대적이고 상징적이다.
유행을 쫓는 허영심과 명예에 연연하는 어떤 사람도 한 순간에 몰락할 수 있다는 교훈과 함께 겉으로는 화려면서도 내공이 허술한 시대상을 비꼬아 웃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처럼 빠져 죽은 수영선수가 누구인지 캐어묻는 일은 의미가 없다. 특정한 개인일 수도 있고, 익명의 다수일수도 있다. 전홍구의 시가 더욱 깊고 넓은 풍자시의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저항적이고, 더 싸늘한 냉소적 시선을 갖추어 나가는 일일 것이다. 온 몸을 던져 비틀린 시대에 저항하는 차가운 정신적 항체를 길러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전홍구의 냉랭한 풍자시를 기대하는 평자의 마음이 조급하다.
한없이 땅에 구른다
/ 갈나무 잎은 마르다 지는데
/ 새는 왠지 분주하고
/ 약간 기우뚱한 바위에 앉으니
// 바람을 타고 오는
/ 심연(深淵)의 소리
/ 여름 뙤약볕에 불안들이
/ 우르르 쿵 먹구름 같다
// 등 뒤로
/ 나약한 작은 나무가 보인다
/ 간밤 꿈 속에 난 죽었다
/ 살았다
// 밋밋한 무위의 가슴 속
/ 무엇을 향하여 가고 있는지...
/ 와락 흰 찔레꽃처럼
/ 긴 숨이 강물이 된다.
장은해 시 “풍경 속을 걷다가” 전문 -문예사조 9월호
장은해의 시에서 느끼는 정감은 격정과 안정감이다. 격정과 안정감이란 정서가 선뜻 어울릴 것 같질 않는데 이러한 거리감에서 장은해 시의 묘미를 느끼게 된다. 격정과 안정감이라는
정서가 서로 대응하면 갈등구조가 된다. 장은해는 정서적 내면 갈등(격정)을 차분하게 관리해 나가는 자기감정의 조련사 격이다. 외연(外延)상으로 나타나는 언어와 시구는 평이하게 노출되어 있지만 내포(內包) 된 정서는 격정인 갈등을 포괄하고 있다. 이렇게 읽혀지는 근거는 시의 문맥에서 찾을 수 있다. 시가 만들어낸 문맥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케 하는 유추과정이 자연스럽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추과정을 안내하는 시인은 정서적으로 위대하고 장은해가 그러하다.
본문의 1연에서 ‘한없이 땅에 구른다“와 3연의 ”간밤 꿈 속에 난 죽었다“의 사이에 ”바람을 타고 오는 심연의 소리“가 시적 분위기를 묘하게 얽어 놓는다. 이러한 시적 뉘앙스는 자아의 내면이 격정적인 갈등을 격고 있다는 방증이다. 장은해의 시에서 갈등과 함께 안정감을 찾을 수 있다는 2중 구조는 내용과 외연상의 표현이 침착하게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갈나무는 마르다 지는데 새는 왠지 분주하고“ 이 한구절의 시구에서 장은해 시의 면모를
탐색해 낼 수 있다. 잎이 지고 새는 분주한 상황을 그려보면 지는 잎은 안정감이고, 분주한 새는 격정과 갈등이다. 얼마나 차분한 안정감을 주는 표현인가...4연 전체가 모두 이러한 편안한 문체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장은해 시의 특색이며 장점이다. 함께 게재 된 시
“벌레와 나” “싸리꽃”에서도 장은해 시의 안정감이 돋보이고 있는 점은 내공이 다져진 이 시인의 내일을 밝게 하고 있다. 삶의 현장에서 온갖 갈등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차분하게 마음을 달래주는 편안한 시를 많이 들려 줄 것을 장은해 시인에게 기대한다.
월간 문예사조에 게재된 시의 분위기가 예전 같질 않다. 눈길을 멈추게 하는 작품이 늘어나고 연구해보고 싶은 시인도 더러 만나게 된다. 좋은 현상이다.
지난 8월호 월평을 싣지 못한 월평자의 마음도 편치 않다. 8월호 월평 누락 사유를 물어온
독자도 있었다고 하니 더욱 미안하다. 시인이 독자를 얻고, 독자가 시인을 기꺼이 찾는 시적 환경이 알차게 영글어가는 가을이 되었으면 한다.
시인들의 건필을 빈다.
“끝”
'해변의 길손(나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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