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보도자료

제주불교(2006. 5. 26)

相民 윤봉택 2006. 5. 29. 23:36

 

 

서귀포불교정토거사림 초청 강연-윤봉택씨의 ‘금광명경문구와 제주인의 항몽의식’
“佛力의지 국난극복 위한 염원 발현”

제주서 조조된 목판본 중 시기 가장 앞서

“판각통한 법보시로 항몽의식 고취 가능성”

우리나라가 외국에 대해 우월성을 갖는 것은 바로 인쇄문화에 있다. 즉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直指)’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으로 알려진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가 그것이다.

고려조 1296년 제주에서 「금광명경문구」라는 불경(佛經) 목판이 판각됐다는 것은 부처님의 원력을 빌어 원나라 세력에 맞서 일어선 자주적 항몽(抗蒙)의식에서 비롯된다. 또한 제주의 역사·문화는 물론 불교 사상적으로 볼 때 제주인의 자긍심과 정체성이 밝혀진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금광명경(金光明經)」은 「법화경」·「인왕경」과 함께 ‘진호국가삼부경(鎭護國家三部經)’의 하나이다.

천태종 창시자인 천태 지자대사는 국가에 어려움이 일어났을 때 이 경전을 통해 국난을 극복했을 만큼 호국경전 중 으뜸으로, 이는 경전에 있는 ‘사천왕품’에서 비롯된다.

「금광명경」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나라가 어렵거나 민심이 불안할 때 조정에서 ‘금광도량’의 법석을 열어 고승을 청해 법문을 들었을 정도로 매우 소중하게 여겨왔다.

또한 천태 지자대사가 설하고 그의 상수제자인 장안대사가 기록한 「금광명경문구」는 「금광명경」을 자세하게 번역한 주석서로서 ‘천태 오소부’의 하나이다.

「금광명경현의」가 「금광명경」에 대해 천태의 관점을 총론한 것이라 한다면 「금광명경문구」는 그 총론에 근거해 자세하게 주석한 것이다.

「금광명경」이 이처럼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경이 지니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불교가 호국불교로서의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경의 내용처럼 왕이 이 경을 호지하게 되면 국토가 안정되고 백성의 고통을 여의며 모두가 안락을 얻게 되므로 불력(佛力)에 의지해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당시 왕조와 민중의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찰 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부처님의 위엄을 보이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13세기 제주도와 고려·몽고·삼별초와의 관계를 먼저 살펴본다.

탐라는 1073년(문종 27년) 팔관회에 참석해 예물을 바쳤고, 1105년(숙종 10)에 탐라국이 폐지돼 탐라군으로 강등되면서 고려의 한 지방으로 편제됐다.

또한 1153년(의종 7년)에는 12명이 방물을 바쳤는데 이 시기에는 탐라군에서 탐라현으로 강등됐다.

▶ 사진설명 : 서귀포정토거사림은 21일 윤봉택씨(서귀포시 문화재담당)를 초청해 ‘금광명경문구와 제주인의 항몽의식’ 특별강연을 개최했다.
몽고는 1231년(고종 18년) 몽고장군 살례탑이 처음 고려를 침공한 이후 1253년 몽고와의 화해를 하기까지 7차에 걸쳐 고려를 유린했다.

탐라와 몽고와의 교통은 1266년(원종 7년) 처음 이뤄졌다. 이후 1268년에는 일본 정벌에 필요한 선박을 제주에서 건조했고, 1280년에는 선박 건조에 필요한 3000척 분량의 목재를 공출했다.

이처럼 「금광명경문구」 판각 시기까지 탐라는 고려의 한 지방으로서 몽고가 일본 등을 정벌하는데 필요한 선박용 목재 등을 주로 공급하고 선단을 수리하는 등의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삼별초가 탐라에 입도한 시기는 1270년 경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사전에 제주에 주둔한 고려군을 쉽게 제압하고 항거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에 부임했던 관리들의 수탈로 인해 탐라인들이 삼별초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1273년 탐라에서 항거하던 삼별초가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에 의해 완전 토벌되자 원은 탐라를 호마(胡馬) 방목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탐라는 본격적으로 원의 통치에 놓이게 된다.

이후 1374년 최영에 의해 원의 목자(牧子)가 완전 섬멸될 때까지 102년 동안 고려와 원의 지배를 받게 됐다.

제주도에서 「금광명경문구」가 판각된 시기는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재조대장경판’이 조조(彫造)된 1236∼1251년 후 45년이 지난 1296년(충렬왕 22년)이다.

제주도에서 「금광명경문구」가 간행된 1296년은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압된 후 23년, 법화사 중창불사가 완료된 후 17년이 지난 시기로써 당시 제주는 원의 지배 세력이 매우 막강했던 때였다.

애월읍 광령리에 소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묘련사(妙蓮社)에서 판각된 「금광명경문구」는 현재까지 제주도에서 조조된 목판본 중 가장 시대가 앞선 것일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확인된 것 중 고려조 제주도에서 발간된 유일본이다.

그러나 묘련사에서 판각된 「금광명경문구」의 사찰 판본과 간인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금광명경문구」를 실사하기 위해 1934년까지 보관했던 송광사에서 이를 확인하려 했으나 현재 송광사에는 보존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으며 일본 국회도서관 등에 조회를 의뢰했지만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묘련사판 「금광명경문구」에 대한 첫 기록은 전남 순천시 조계산 송광사에 보관돼 있는 ‘사고(史庫)’인데 ‘金光明經文句卷下 元貞二年高麗國濟州妙蓮社奉宣重彫(금광명경문구소권하 원정이년고려국제주묘련사봉선중조)’라고 기술된 내용이 있다.

또한 ‘幹善瀑布寺住持禪師 安立(간선폭포사주지선사 안립)’이라는 기록은 당시 판각은 폭포사 주지였던 안립선사의 주도에 의한 불사(佛事)를 나타내고 있다.

간인 자료에 의해 판본상태를 살펴보면 권수두의 1장은 온전하나 24장과 마지막 31장은 많이 마모돼 있다.

1장인 경우 당초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보각(補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원의 강제 공출 등으로 피폐가 잇따랐던 상황에서 묘련사에서 불경 판각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금광명경」이 지니는 의미로 보아 당시 스님들이 몽고 지배라는 굴욕적인 국가적 어려움을 불력을 통해 이겨내고자 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금광명경문구」 판각이 묘련사 스님이 아닌 지리적으로 동떨어진 폭포사 주지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하다.

이는 간기 표기처럼 선사(禪師)라는 법계 호칭이 사용될 만큼 고승이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천태종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당시 묘련사가 제주불교에서 천태사상의 중심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묘련사(妙蓮社)’라는 이름에서 ‘사(寺)’가 아닌 ‘사(社)’를 썼던 것은 국가에서 보조를 받았던 전남 강진 백련사(白蓮社)처럼 천태종 종도들간의 교류 중심으로서 이에 필요한 불전을 판재가 풍부한 제주도에서 판각해 널리 법보시함으로써 민중들의 항몽의식을 적극적으로 고취시켜 나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금광명경문구」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심층 연구는 제주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되찾는 일이므로 이에 대한 불교계, 관계기관과 도민의 적극적인 의지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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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정토거사림 특강 개최
21일 윤봉택씨‘금광명경문구와 항몽의식’주제 강연

서귀포불교정토거사림(회장 김용길)은 지난 21일 거사림회관에서 정기법회 및 윤봉택씨(서귀포시 문화재담당)를 초청해 ‘13세기 「금광명경문구(金光明經文句)」 판각을 통한 제주인의 항몽의식’ 주제의 특별강연을 개최했다. <관련 기사 4면>

이날 법회는 회장 인사·신입회원 소개 등에 이어 특강으로 진행됐다.

윤봉택씨는 이날 특강에서 “제주 묘련사에서 판각된 것으로 밝혀진 「금광명경문구(金光明經文句)」는 현재까지 제주에서 판각된 목판본 중 가장 시대가 앞선 것일 뿐 아니라 고려조 발간된 유일본”이라며 “경전이 지니는 의미로 볼 때 당시 스님들이 몽고지배라는 국난을 불력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윤씨는 “「금광명경문구」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다각적인 연구, 판본을 찾는 작업 등은 고려시대 제주의 역사와 문화, 불교 사상적 접근을 통해 제주의 정체성을 되찾는 일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김용길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윤봉택씨의 노력으로 제주불교와 관련된 소중한 사료 발굴이 이뤄짐에 따라 불자로서 이에 대한 이해와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강연을 마련하게 됐다”며 “거사림 회원들은 수행정진뿐 아니라 제주불교 역사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는 계기로 삼길 바란다”고 말했다.
2006-05-25 오후 2:06:28
강석훈 기자
 
 
2006-05-25 오후 1:51:42

강석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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