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따라서

가남정

相民 윤봉택 2008. 4. 29. 00:38
 

2008. 4. 13.


가남정(伽南亭)


고운(孤雲  최치원)의 자취를 씻어 내리다 잠시 머무름을 허락하는 곳

가남정


지난 4월 13일

해인사를 지나 내려 오면서

길가 서쪽에 머물러 있는

가남정을 찾았습니다.


가남정은,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하림리 751

월광천 흐르는 곳에

있습니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80호로 지정되었으며

가남정은, 조선 명종 때 태어나시고

이곳에서 성장하신

서산정씨 후예이신

문암 정인기·금월헌 정인함·우천 정인휘·낙제 정인지 4형제를 위하여

1911년 4월 문중에서 지은 정자입니다,


이들 4형제는

의병장 정인홍(1535-1623)의 5촌 형제들로서

선조(宣祖)대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정인홍을 도와 의병활동에 참여했던 충신들입니다.


정자 앞에는 금월간신도비(琴月軒神道碑)가 세워져 있으며

선생이 직접 심으셨다는

수령 450년, 몸통 둘레 약 6m에 이르는 느티나무가 함께

세월의 무게를 넘기고 있습니다.


가남정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입니다.

 

 

이 가운데

정인기, 정인함 두 분은 남명 조식선생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문하생들입니다.

 

 

@ 정인함(鄭仁涵, 1546∼1613)의 자는 덕휘(德輝)이고 호는 금월헌(琴月軒)이며, 본관은 서산(瑞山)으로 성주(星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6년(명종 1년)에 아버지 건(健)의 아들로 태어났고, 정인홍(鄭仁弘)의 종제(從弟)로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에 관한 자료는 『호산연방집(湖山聯芳集)』 2권 1책에 『금월헌실기(琴月軒實紀)』가 전한다.

  급문 : 그는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배움을 청하였다(『德川師友淵源錄』, 卷4, 「門人續集」)고 한다.

  과거 및 벼슬 : 정인함은 43세(1588년)에 식년 진사 제3등으로 합격하였고(『司馬榜目』), 56세(1601년)에 식년 문과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56세(1601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12월 29일에 형조좌랑에 제수되었고(『宣祖實錄』 34년), 57세(1602년) 4월 11일에는 병조좌랑에 제수되었으며

        (『宣祖實錄』 35년), 59세(1604년) 7월 11일에는 호조정랑이 되었다(『宣祖實錄』 35년).

        60세(1605년) 7월 27일에는 영덕현령(盈德縣令)이 되었다(『宣祖實錄』 38년).

  강학 및 교유 : 정인함은 44세(1589년) 봄에 우곡재(尤谷齋)에 가서 모임을 가졌는데,

    이 때 문경호, 하혼, 조응인, 김두남, 강익문, 정인준, 이대기, 박수종 등도 함께 모였다(『雪壑先生文集』).

 의병활동 :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정인함은 창의하여 곽재우를 따라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적을 토벌하였다.

   후에 선조가 그 충의를 가상히 여겨 원종 1등 공신에 녹훈하였다.

 향사 : 그는 1613년(광해군 5년)에 세상을 떠난 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운계서원(雲溪書院)에 배향되었다.

 

 

 

@ 정인기(鄭仁耆, 1544∼1617)의 자는 덕유(德裕)이고 호는 문암(文庵)이며, 본관은 서산(瑞山)으로 성주(星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4년(중종 39년)에 아버지 건(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정인홍의 종제(從弟)로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자료는 『호산연방집(湖山聯芳集)』 2권 1책 중에 『문암실기(文庵實紀)』가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정인기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남명선생을 배알할 때, 남명선생은 그의 학문이 독실하다고 하여 허여하였다

            (『湖山聯芳集』上, 「文庵先生實紀」, 附錄, 「遺事」).

  벼슬 : 정인기는 59세(1602년)에 유일로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인륜이 무너지자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다.

  교유 : 정인기는 이언영(李彦英), 이산남(李山南) 양현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향사 : 정인기는 1617년(광해군 9년)에 세상을 떠난 후 운계서원(雲溪書院)에 배향되었다.

 

 (펌) 자료 : 남명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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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남정 가는 길

 정자 건너로 야천이 흘러

 월광에서는

 다시 월광천의 냇물을 빚어 내는 곳 

 

야천 새이로

정인함 선생이 손수 심으셨다는

느티나무가 빈 가지를 월광천에 드리우는데,

 

 

정자 정문 앞에 심어 자라는

느티나무 

 

몸통 둘레가 6m에 가까운

450여년의 빈 세월

 

 

 

가남정 울타리입니다.

담장은 비교적 높게 조성하였습니다.

 

이 담장에 사용된 돌은

바로 앞으로 흐르는 야천에서 가져다가 하나 하나

쌓은 것입니다.

 

 

담장 마감은 기와를 이용하였고

암기와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처리하였습니다. 

 

가남정입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입니다.

 

기단부 또한 담장처럼

시냇가의 돌을 운반하여 쌓아 다졌습니다. 

 

 

 야로면 하림리 소재

 가남정

 가야산 남쪽에 위치하여 불려진 이름인 듯, ......

 

담장 경계를 넘어서면

문득 다가서는

인연

또 다른 그리움의 경계가 놓이고, 

 

돌아서면

모두가 머흐러지는 것을 

 

담장은 방형으로 지형 지세에 맞게 쌓았습니다. 

 

가남정 현판 

 

 좌측면에는 별실을 두어

 제례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가남정 전경 

 

 

금월헌 정인함 선생의 신도비(琴月軒神道碑)

 돌아 오는 길

 가남정 건너엔 바람이 이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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