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따라서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相民 윤봉택 2012. 7. 28. 16:54

2012. 07. 27.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입니다.

 

건탑 시기는

탑 양식으로 볼 때, 8세기 중엽(740~780)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27일 대전청사에서 일을 마치고 난 다음

경남 창녕읍내에 있는 술정리 동삼층석탑을 찾았습니다.

뱅기 시간에 맞추다 보니

겨우 사진만 담고 돌아 섰습니다.

 

시즌이 아니었으면, 충분하게 주변 유적을 살피고

담날에 섬으로 내려 오려 했는데, 참으로 아쉬움이 많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담에 세번 더 가야만 살필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탑의 상륜부는

이미 인연이 다하여 그날의 그리움만 남겨 놓은 채

먼 곳으로 뭍혀 있고,

시방은

흐르는 개울 물소리에 잠겨 삼복 한겹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탑이 있는 곳에는

분명, 거찰이 있었고

거찰 또한 사바의 인연과 함께하는지라

인연이 흩어지면 따라 흩어지고

불연(佛緣)이 닿으면 또 다시 구름처럼 일어섰다가

 

산 능선 넘어서면

다시 또 다시 먼 그리움 처럼 기다리게 되는 것을

무엇을 탓하시려 하심인가

 

처음에는

인양사仁陽寺였다가

고려조에 와서는

송림사松林寺였음으로

이 땅의 흔적을 살피려 하나니

 

부질 없어라

사바의 인연이여

 

<문화재청 자료>

종목 : 국보 제34호

명칭 :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昌寧 述亭里 東 三層石塔)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 석탑

지정 : 1962년 12월 20일

소재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시장2길 37 (술정리)

시대 : 남북국시대

   

 탑이 세워져 있는 창녕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영역에 속해 있던 곳이며,

 진흥왕 때부터 신라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기단에는 위·아래층 모두 각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탑신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한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가 간결한 모습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1965년 탑을 해체, 복원할 당시 3층 몸돌에서 뚜껑달린 청동잔형사리용기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바닥돌 주위에 돌림돌을 놓았던 구조도 밝혀졌다.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인해

 충분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세부적인 수법도 정교하여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과 비길만한 기품이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 영역에 속해있던 창녕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볼 때,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탑은 이중기단< 二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 塔身 >을 형성한 신라< 新羅 >석탑의 일반형이다.

 그 큰 규모와 조각수법 등이 불국사 석가탑< 釋迦塔 >과 비교될 만한

 통일신라< 統一新羅 >성대< 盛大 >(8세기 중엽)의 우수한 석탑이다.

 

 이 탑에 '동< 東 >'자를 붙인 것은 한 사역< 寺域 >안에 탑이 쌍으로 건립되어 있어서가 아니고,

 술정리에 2개의 탑이 유존하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서삼층석탑< 西三層石塔 >은 여기서 2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1965년 주위에 있던 민가들을 철거하여 정화보존 조치를 취하였고 탑도 함께 해체 수리하였다.

 이때 3층탑신 윗면에는 네모진 사리공< 舍利孔 >이 있어서 뚜껑모양의 청동잔형용기< 靑銅盞形容器 >와

 황색< 黃色 >의 유리병, 유리구슬, 향나무편< 片 >등이 발견되었다.

 

 상륜부< 相輪部 >는 모두 없어졌으나 탑이 크고 짜임새가 장중하며 훤칠해 기품있게 보인다. 현재의 높이는 5.75m이다.

 

 

 이 탑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120번지(대한불교 조계종 인양사 소유)에 있습니다.

 

 탑의 입구에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상륜부와 지대석을 보호하는 주변 석재들은 인연 따라 모두 흩어졌지만

 건탑 이래, 기단과 탑신은 온전히 남아, 그날 불연(佛緣)의 지순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신라의 3층석탑의 대명사 불국사 석가탑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당대 최고의 걸작품,

 하여 상륜이 없어도 국보 반열에 함께 하였습니다.

 

자료사진 ; daum

탑을 중심으로 주변 현황입니다.

 2011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된 "창녕 술정리 사지 -동서 삼층석탑 주변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탑 서쪽 추정건물지에서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명문기와 " ‘松林寺瓦草’명 와편이 출토되었고,

 ‘松林寺’상단에…‘興國’또는‘十日’명문이 중첩되어"있다라고 하여

 당초 동삼층석탑의 위치에

 창건된 사찰은 인양사仁陽寺로 추정될 수가 있겠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松林寺로 사찰 명칭이 변경되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명문기와 자료사진(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탁본

 - 송림사와초松林寺瓦草 

 탑 서쪽 발굴자료(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자료사진(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촬영 1913년(탑 동쪽) 

자료사진(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촬영 1932년(탑 서쪽)

  2009년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1965년에 보수를 하였지만 다시 개보수가 이뤄져야 한다고 합니다.

  보수할 때에 3층 탑신에서 사리함과 함께 황색유리사리병, 사리7과, 유리구슬 등이 나왔고

  복원하면서 사리는 별도의 사리함에 넣어 다시 봉안하였으나,

  사리장엄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날에는 얼마나 장엄 하였을까요

  지금은 모두 옮겨지고 사라지고 하기를 몇 번이었을까

비가 오면 흘러내린 물이 탑 안에 고이지 않고 바로 기단석을 따라  지대석으로 내리고,

다시 지대석 밖으로 흘러 내릴 수 있도록 모서리에 작은 틈새를 내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모두 사라지고 하나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1965년 급하게 보수가 이뤄지면서 이렇게 지대석 주변으로 보호석 한 줄을 두었나 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제가 이 탑을 도굴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었다는 것에 다소 위안을 삼습니다.

 천년의 무게가 무척 힘들었나 봅니다.

 석탑을 받쳐주는 지대석 아래로 세월의 무게가 느껴옵니다.

  그날에 어린 시절

  동내 아이들이 장난 삼아 파 놓은 것일까요

  하대중석 모서리 면에, 하나는 작은 동전크기로, 또 하나는 3배 크기로 동그랗게 파 놓았습니다.

 

 기단 맨 우에 해당하는 상대갑석과 1층 탑신 괴임석입니다. 

 풍경은 대웅전 처마에만 있는 게 아니라지요

 이렇게 옥개 전각 자락에도 풍경을 달아 구도자들에게 25시간 수행하실 것을 경책하였다지요.

 풍경소리가 사라지면서 .......

 처음 그대로, 우리가 돌아 갈 수 있다면, 저 아늑한 풍경소리를 빚어 뭍 중생의 번뇌를 날릴 수가 있겠지요  

 참으로 장엄한 옥개 받침

 그 시절 이 탑을 빚은 무명의 석공은 단순한 석공이 아니라,

 분명 한 시대를 잇게한 승려가 아니었을까

 

 

 

 

 발굴하면서 출토된 석조물

 석탑 주변으로 보호책을 놓아 출토유물을 가지런하게 살피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어느 건조물의 주초가 되었었는지요

  다시 가는 그날에는

  분명 모두가 본래면목을  찾아 있기를 소원해 봅니다. 

 희유하여라

 술정리 동삼층석탑이여

 금당 추정지로 알려진 탑 후면

 2009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의견처럼

 전체적으로 발굴이 되고 세부적인 추진 계획이 수립되어, 하나 둘 그날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담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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