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보도자료

금광명경문구(제주불교신문)

相民 윤봉택 2006. 5. 5. 09:25
목판본 금광명경문구 하권 간기 충렬왕 22년 ‘제주 묘련사’서 중조 기록



▶ 사진설명 : 금광명경문구 하권의 간기. 간기에는 제주 묘련사에서 폭포사 주지 안립선사의 주도로 판각된 사실이 기록돼 있다.
고려시대 당시 제주에서도 불경(佛經) 목판이 판각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서귀포시는 지난 25일 “현재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재조대장경판’이 주조된 후 45년이 지난 1296년(충렬왕 22년) 제주 묘련사(妙蓮社)에서 「금광명경문구(金光明經文句)」가 판각됐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사실은 「금광명경문구」 하권 말미의 간기(刊記)에 ‘고려국 제주 묘련사에서 폭포사 주지인 안립선사의 주도하에 판각됐다’는 기록을 통해 확인됐다.

「금광명경문구」는 석가여래가 왕사성에 있는 기사굴산에서 처음 신상보살과의 대화로 시작돼 설법한 경전인 「금광명경」에 대해 천태 지자대사가 설하고 그의 제자 장안 관정대사가 기록한 주석서다.

이번 확인된 「금광명경문구」는 서지학을 연구하고 있는 윤봉택씨(서귀포시청 문화재담당)가 최근 1934년까지 「금광명경문구」 권하 1책이 보존됐던 송광사 성보박물관과 1938년 이 책을 사진으로 인화 편집했던 「순천송광사장고려판천순판불전」의 자료 사실을 확인하면서 밝혀졌다.

이에 따라 이 「금광명경문구」는 제주도에서 주조된 목판본 중 가장 시대가 앞선 것이며 현재까지 확인된 것 중 고려시대 제주에서 발간된 유일본이 된다.

또한 목판이 판각된 ‘묘련사’는 현재 애월읍 광령리 대각사(주지 법무스님)가 자리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곳 절터에서는 1987년 제주시 외도동 수정사지 등에서 출토된 명문기와를 비롯해 석물·도자기편·기와편 등 다량의 유물이 발견됐었다.

윤봉택씨는 “고려시대 제주에서 목판이 판각됐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만으로도 역사·문화적 가치가 크다”며 “목판을 판각한 묘련사의 당시 위상은 물론 천태사상과 제주와의 연관성 등 서지학적·불교사상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호국경전’ 금광명경 문구 판각 사실 확인 의의

민중과 함께 하는 불교 재확인

元지배 감안 佛力 통해 국난극복 의지 천명

고려시대 제주불교 체계적 조사·연구 시급

윤봉택씨 석사학위 논문 준비과정에서 발견

고려시대 제주도내 사찰에서 「금광명경문구」가 판각·간행됐다는 사실은 제주사 뿐 아니라 제주불교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금광명경문구」 하권 간기(刊記)에는 ‘金光明經文句疏卷下 元貞二年高麗國濟州妙蓮社奉宣重彫 幹善瀑布寺住持禪師 安立(금광명경문구소권하 원정이년고려국제주묘련사봉선중조 간선폭포사주지선사 안립)’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을 통해 1296년 제주 묘련사에서 폭포사 주지 안립선사의 주도로 「금광명경문구」가 판각됐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금광명경」은 석가여래가 모든 경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경이라 할 정도로 의미가 큰 경전이기 때문에 「법화경」·「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과 함께 ‘호국삼부경’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변란이나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임금이 고승을 초청해 법회를 열어 이를 통해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호국경전’이다.

또한 「금광명경문구」는 천태종 창시자인 중국 수나라 천태대사가 「금광명경」의 어려운 구절에 대해 풀이한 것을 그의 제자 장안대사가 기록한 주석서로서 천태종의 오소부(五小部) 중 하나이다. 당초 「금광명경문구」는 상·중·하권 등 3책으로 발간됐지만 현재 전하는 자료에는 하권만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번에 확인된 묘련사판 「금광명경문구」는 목판본으로 전 3권 중 1책으로서 1296년 판각됐지만 현전하는 간본 소장처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간인 자료에 의한 판본 상태를 살펴보면 권수두(卷首頭)의 1장(張)은 온전하나 24장과 마지막 31장은 많이 마모돼 있음을 알 수 있고 1장인 경우 당초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보각(補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금광명경문구」가 간행된 1296년은 원나라의 지배세력이 막강하던 시기다. 당시 제주지역은 원의 요구에 의해 말을 비롯한 각종 특산물 등이 강제 공출되는 등 많은 피폐가 잇따랐다. 바로 이런 시기에 사찰에서 「금광명경문구」가 판각됐다는 것은 「금광명경」의 의미로 볼 때 당시 스님들이 국가적 어려움을 불력을 통해 소멸하고자 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묘련사’의 위상과 역할도 연구 과제로 남아있다.

당시 제주는 난대림 지역으로 「팔만대장경」의 판목으로 사용된 ‘후박나무’를 비롯한 녹나무·담팔수나무 등 목판 판각에 적합한 나무들이 풍부했다. 그러나 목판을 판각해 간행할 정도의 기술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사세(寺勢)와 위상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당시 묘련사는 제주를 대표하는 사찰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금광명경」이 천태종의 오수부 중 하나인 점을 감안할 때 당시 제주지역에 천태종의 교세가 확장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묘련사는 천태사상과 밀접했거나 천태종의 교세 확장에 있어 중심 역할을 했던 사찰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처럼 「금광명경문구」 목판본이 고려시대 제주에서 판각됐다는 사실은 그동안 막연히 제시됐던 제주지역에서의 불교 위상 제고는 물론 고려시대 사찰과 스님들의 역할 등을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같은 점 등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 제주불교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연구의 필요성이 시급하게 요구되고 있다.

한편 이같은 사실은 전남대 문화재학 석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윤봉택씨(50·서귀포시청 문화재담당)가 관련 자료를 수집하다 발견했다.

2006-04-27 오후 8:01:43
강석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