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04. 13.
● 계명사 ⇒ 황산 ⇒ 구화산의 육신보전 ⇒ 고배경대 ⇒ 화성사 ⇒ 남전사지
13일에는
남전 보원스님의 수행처소였던 남전사지를 찾았습니다.
남전사는 안휘성 지주시 곁에 있는 동릉시銅陵市 동산진銅山鎭 남전촌南泉村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찾았다는 것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혜국 큰스님과
그 일행들이 남전사지를 찾아 내어 순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제 지주시내에서 1박한 후, 8시에 남전사지를 향해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내인으로는 남전사지를 방문한 사실이 없어 돌아서기를 몇 번이었는지,
지주학원 구화산佛문화연구소의 중한南泉禪學연구소의 도움으로
10시 쯤에 겨우 닿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남전사지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은
남전사는 남전 보원스님이 수행처소였으며, 저 수만리 먼길 선법을 찾아 신라에서 이곳까지
흔연히 다가오셔서, 남전 보원스님의 선법을 전해 받은 선법도량,
구산선문 중 하나인 영월 사자산문의 개산조가 되신 신라의 도윤 철감(798~868)선사께서
825년에 당나라에 입국하여서는 마조 문하인 남전 보원의 법을 전해 받고,
847년에 귀국하여서는 쌍봉사에서 선풍을 진작하였고,
그의 전법제자인 절중 징효(826~900)는 영월땅 사자산 흥녕사(興寧寺)에 머물며
선문을 높이 열어 우리나라 선풍을 고양시킨 그 발원지이기 때문입니다.
철감 도윤스님은 그의 나이 28세 때 당나라로 구법길을 떠났습니다. 남전 회상에 머무른
철감을 보고 남전화상은 “나의 가르침의 핵심은 해동(한국)으로 돌아가리라
(오종법인 귀동국의 吾宗法印 歸東國矣)”라고 대중 앞에서 설파하실 정도로 철감을 아꼈습니다.
바로 그 남전사입니다.
선에 대한 잠깐 사족입니다.
선禪은 흔히 우리에게는 참선參禪으로 알려져 있으며, 굳이 표현을 하자면 앉아 결가부좌하여
화두를 갖고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선禪은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 하나 하나에
담겨 있으며, 화두를 통해 수행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듯싶습니다.
이러한 선禪은 인도에서 시작되어 달마대사 때 비로소 중국(양무제 때)으로 전해 졌으며,
우리나라에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에 아홉 스님에 의해 구산선문이 열리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참선 보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류를 중심으로 번역하고 그 경전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하였었습니다.
그리고 참선이 대승선인 선종禪宗으로 확립되기는 6조대사인 혜능스님 때에 와서 선종으로서의
선종가풍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진덕여왕(647~654) 때 법랑法朗스님에 의해 중국 선종의 제4조인 도신스님의
법을 전해 받았습니다. 또한 신행神行스님에 의해 북종선이 전래되기는 하였으나 미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선종이 전래되어 선풍이 고양된 것은 도의道義선사부터입니다.
도의선사는 784년(선덕왕 5) 당나라의 강서성 홍주의 개원사 마조 도일의 문하인
서당 지장(735~814)에게는 법을, 백장 회해로부터 법요을 전해 받고, 821년에 귀국하여서는
법을 전하려 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은 교리만 숭상할 뿐 무위법을 믿지 않아,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면서 40년 동안 수행하시다가 제자인 염거에게 법을 전한 뒤 입적하였으며,
염거는 체징에게 전하였습니다.
후에 체징(804~880)은 당에 입국하여 고승을 찾았으나, 더 구할 법이 없음을 알고 그대로 귀국하여
① 장흥 가지산에 보림사를 창건하고 선문을 개산하였으며,
② 남원 실상산문의 실상사 개산은 홍척洪陟이 도의선사와 마찬가지로 서당 지장에게 법을 받아
826년에 귀국하여 지리산에 실상사를 창건 개산함으로서 도의보다는 5년 늦게 귀국하였으나,
산문은 먼저 열었고,
③ 고성 동리산문의 개산조인 혜철慧澈 814년에 당으로 가서 서당 지장의 법을 받고,
839년에 귀국하여 동리산 태안사에서 동리산문을 열었는데, 신라의 고승 도선국사는
바로 혜철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④ 문경 희양산문의 봉암사 산문은 유일하게 당나라에 가서 법을 구하지 않았으나,
신라 진덕여왕(647~654) 때 당나라로 가서 중국 선종의 제4조인 도신스님의 법을 전해 받은
법랑法朗스님의 전법제자인 신행神行스님(후에 신수문하에서 북종선도 전해 받음)과
그의 전법제자 준범遵範에서 다시 혜은慧隱으로 혜은은 다시 진감 혜조에게 그 법맥이 이어졌고,
진감 혜조는 도헌 지선(824~882)에게 전법하였으므로 중국 선종의 제4조인 도신의 법맥을 이은
것입니다. 그리고 도헌에게 전법한 진감 혜조(774~850)는 당나라에 범패를 배운 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한 스님이기도 합니다.
⑤ 창원 봉림산문은 현욱 원감(787~868)이 당나라에 입국하여 마조문하인 장경 회휘에게
법을 전해 받고 837년에 귀국하였으며, 그의 전법제자인 심희 진경(854~923)이 (897~912)에
봉림사에 머물면서 봉림산문을 열었고,
⑥ 보령 성주산문은 무염 대낭혜(801~888)가 821년 당나라에 입국하여 마조 문하인
마곡 보철의 법을 전해 받고 845년에 귀국하여 성주사에 머물면서 성주산문을 열었으며,
⑦ 강릉 사굴산문은 범일 연휘(810~889)가 831년 당나라에 입국한 후 마조 문하인
염관 제안의 법을 전해 받고 847년에 귀국하여서는 40여 년 동안 굴산사에 머물면서
사굴산문을 열었습니다.
⑧ 영월 사자산문은 도윤 철감(798~868)이 825년)에 당나라에 입국하여서는 마조 문하인
남전 보원의 법을 전해 받고, 847년에 귀국하여서는 쌍봉사에서 선풍을 진작하였고, 그
의 전법제자인 절중 징효(826~900)는 영월땅 사자산 흥녕사(興寧寺)에 머물며 선문을 진작시켰으며,
⑨ 해주 수미산문은 이엄 진철(866~932)이 896년 당나라에 들어가서 조동종 계통인
동산 양개의 제자인 운거 도응(6조 혜능 ⇒ 청원 행사 ⇒ 석두 희천 ⇒ 약산 유엄 ⇒ 운암 담성 ⇒
동산 양개 ⇒ 운거 도응에게 법을 전해 받고, 911년에 귀국하였는데,
고려 태조는 수미산 광조사를 지어 스님을 머물게 함으로서 개산되었는데, 유일하게
북한지역에 있습니다.
한국 선종에 법을 전한 동토 초조에서 9조까지의 법맥도입니다.
초조 : 달마(순례 - 계명사)
2조 : 혜가
3조 : 승찬(순례 - 3조사)
4조 : 도신(순례 - 4조사) ⇒ 법랑 ⇒ 신행 ⇒ 준범 ⇒ 혜은 ⇒ 진감 ⇒ 도헌(문경 희양산문, 봉암사)
5조 : 홍인(순례 - 5조사)
6조 : 혜능(영가 · 청원 · 남악 · 남양 · 하택 등)
7조 : 남악 회양(순례 - 남대사)
청원 행사 ⇒ 석두 ⇒ 약산 ⇒ 운암 ⇒ 동산 ⇒ 운거 도응⇒ 이엄 진철(수미산문, 해주 광조사)
8조 : 마조 도일 (순례 -우민사)
9조 : 서당 지장 ⇒ (고성 동리산문. 남원 실상산문. 장흥 가지산문)
백장 회해
염관 제안 ⇒ 범일 여휘(강릉 사굴산문, 굴산사)
남전 보원 ⇒ 도윤 철감(영월 사자산문, 쌍봉사)
장경 회휘 ⇒ 현욱 원감(창원 봉림산문, 봉림사)
마곡 보철 ⇒ 무염 대낭혜(보령 성주산문, 성주사)
이처럼 한국 선종은, 우리나라에서 출가는 하였으나 당나라에 들어가 정법을 전해 받고,
귀국하여서는 산문을 열어 선풍을 진작함으로서, 중국과는 달리 남북선을 구분하거나
분파하지 않고, 단일 종으로 법맥이 유지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혜국 큰스님 따라 순례한 남전사지는, 6조 혜능 ⇒ 남악 회향 ⇒마조 도일의
전법제자이신 남전 보원(748~834)스님이 주석하시면서 30년 동안 하산하지 않으시고
이곳에서 입적하신 도량입니다.
남전 보원스님의 전법제자 중에는 저 유명한 無字, 喫茶去, 平常心是道 등 화두의 주인공
조주 종심(778~897)선사가 있었는데, 남전 보원스님은 죄 없는 고양이를 살생(?)한 화두
“남전참묘”의 공안을 창출하신 큰스님이십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자산문 개산조인 도윤 철감선사가 남전 보원스님의 법을 잇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남전사는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모든 절이 허물어질 때, 함께 허물어져,
다만 남전사지에는 전탑의 흔적과 전석, 앙련·복련의 전석 파편
그리고 상륜부 등 일부만 남아 있었습니다. 잠시 뒤척이다가 이곳의 복련 전석 파편을 하나 안고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 남전사지 순례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혜국 큰스님의 선종사찰순례단이
처음으로 찾아 방문한 뜻 깊은 순례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법을 전하여 주신 전법도량과 다름이 없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허물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역대 선지식의 비석들은 농가의 외벽을 장식하는 석물로 방치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더욱 그러한 것은 이곳의 석재가 매우 뛰어나 주변에 채석장이 들어서서 밤낮 없이 채석하며
마구 훼손하고 있다는 데서 더 우울하였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이곳에 머무르면서 더 많은 유적을 살펴보려 했지만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남전사지 주변에는 남전스님이 심었을 듯한 대나무와 오동나무가 봄물을 토하듯 길게
자라고 있었고, 주변에는 물소를 이용해 논갈이 하는 농부의 터전에서,
소를 몰며 농사를 지었을 남전스님을 보는 듯, 그 옛날 백장 청규의 가풍이
청산을 나는 듯 했습니다.
안휘성 지주시 건너 동릉시 동산진에 있는 남전마을의 작은 산입니다.
산 전체가 수석을 세워 놓은 듯합니다.
제주도 보다는 날씨가 20여일 빠른 듯 하였습니다.
유채꽃이 다지고
밀감꽃이 열리고 있었으니까요.
남전사지 가는 길
주변에는 논이 있고
그 새이로 대숲 바람이
남전 선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남전사지의 혼불
남전사지가 어디매뇨
앞에서 인도하는 여학생이
지주시에 유학와 있는 한국학생이었습니다.
저 사래 오르는
낮은 바람소리
그 길 따라
남전화상의 선법을 잇기 위해
이억만리 신라에서 온
철감 도윤선사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남전 화상은 저 곳에 있는데
조계선종의 맥을 따라
걸어 가는 길
이곳에서는 불교를 믿는
속인들이 저와 같은 법의를 입고 예불을 모십니다.
많은 어려움에서도
이억만리 철감선사의 길을 따라 온
후예들을 맞이 하시려
현수막 까지 걸쳐 놓았습니다.
이곳에서는
저렇게 법의를 입은 신도님들을
처사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자 신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만,
법의를 입으면
남여 구분 없이 처사가 됩니다.
향을 사루며
한 줄 바람을 세우고
바로 이 무더기가
남전사지의 전탑 터입니다.
터 중심에는 심주를 놓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전탑지의 문화층입니다.
주변에 전돌과 석축이 보입니다.
전탑 기초를 다졌던 석물 파편입니다.
전탑을 쌓았던 전석입니다.
전탑의 중심부 입니다.
예배 올리기에 앞선 큰스님의 감회는 깊기만 합니다.
남전화상이 고양이 한마리를 ......
남전참묘 공안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자산문을 개산하신 철감 도윤 선사의 가르침을
되뇌이며
우리나라에 선종을 심어주신
도윤선사의 참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다시 이 땅에서
남전참묘가 이어지고
조주 무자가 세워지기를
향후 이곳에
우리 선문에서
남전보원화상의 법을 이은
대한국인 철감선사의 표징을 세우고자 서원드리고 있습니다.
전탑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깨어진 석판도
세워진 깃대의 바람도
돌아서 보면
모두가 하나인 것을
중국 전탑에 층과 층 사이를 장엄하는
복련입니다.
층과 층 사이에는
전석에 앙련과 복련의 무늬를 넣어 장엄을 합니다.
복련 전석 파편입니다.
초라함이 서글퍼 한점 안고 돌아 왔습니다.
전탑의 판석 옆에 있는
복련 전석 파편
우리나라로 잠시 나들이 하였습니다.
그대는 누구인가
남전의 물음에
어린 조주의 대답이여라
겨울은 깊고 날씨는 살을 에임이여
스승님은 기체 만강하셨는지요.
(중동엄한 복유화상존후만복仲冬嚴寒 伏惟和尙尊候萬福)
떠나감도
떠나 옴도
모두가 하나인데
그대의 기다림은 너무 아늑하여라.
대숲에 부는 바람
삶전에 빚은 공간에 머무름이여
남전사지를 지키시는
주지스님
옆에 선 나그네는 글쎄.
뉘시요.
남전연구소 연구원들과 남전사지 지킴이 방장스님과 큰스님
저
가운데 선
주장자를 누가 있어
뽑으려나
엄마소는 얼룩소
남전 연구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드리며
큰스님께서 금일봉을 전하셨습니다.
떠나가는 길 따라
떠나 오는 길
남전사지에서 예까지는 직선거리로 1,000m 족한데,
여기 까지 건물이 있을 정도로
남전사는 거찰이었습니다.
그 옛날 남전사 스님들이 빨래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
이곳 주민들이 그 판석 우에서
번뇌를 씻어 내리고 있습니다.
저 물길 닿아 흐름이 멈춰서는 곳
남전사 내 비림에 있었을
부도의 한 부분인 듯
까꾸로 놓여 있습니다.
벽면 자체가 비석으로
마치 수를 놓은 듯 합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벽에 기대어 있음이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우려가 남전사지 지킴이 방장스님을
새롭게 하였나 봅니다.
주초석 아니면
비석의 그림자 뿐입니다.
헛간에 있는 돼지우리 돗통안에도
비석과 석물 석축이 있습니다.
기초 부분 자체가 판석과 비석입니다.
저 창고로 사용하는
집 한채 모두가 비석과 판석입니다.
삶의 흔적은 무엇이고
여적은 무엇이었는지
석계를 딛고 서신 스님
석계로 보아서
당시의 건축 규모를 가름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넓고 컷던 석계를 생각해 보면
그 석계를 딛고 선
건축은 얼마만큼 이었을까요.
여기도 주초석
또 여기는 판석
이 집에도 늘어진 석재들
힘에 겨운 길 따라
바라보면 그 또한 불국정토
오동나무 꽃잎 날리며
다가서는
산빛이여
이제는 물소의 거친 숨소리 조차도
잠시 쉬여야 함을
느끼나니
비림(碑林)이었을 장소로 느껴 추정되는 유구지
수행 처소로 느껴지는 승방지
낮게 열어 오는 눈빛
남전이 심은 오동나무에는
꽃이 피고 시드는데
봉황은 얼만큼
꿈 속을 더디 날기에
조주는 낮잠에서
일어나실 줄은 모르시는가
떠나려는 철감의 후예들을
벗함도 좋으련만
물소를 몰며
벼 심을 논을 경운작업하는 농부님 좀 바라보소
둘러보고 또 보아도
기하무늬를 세긴 주초석
구화산 육신보전이나 화성사의 것보다는
선이 더 뚜렸하고 깊습니다.
화순 운주사의 석탑 기하무늬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이 하나에 놓인
사연도 다함이 없거늘
유채씨 공동수매 안내 공고문
하나 하나 건너지 못하시고
살피고 또 살피시는
큰스님의 기다림
단단한 껍질을 벗길 때 사용했던
방아기구입니다.
농기구 하나
아마 13세의 어린 조주 사미께서도
이곳에서 남전 노사를 따라 벼농사를 지었을 것입니다.
돌리고, 돌리고, 또
돌리고
분뇨를 담은 도구도 문화유산입니다.
내주의 주초석
내주의 주초석
계단에도, 주초에도
모두 건물 관련 유적 뿐입니다.
잠시 머물러 있는 흔적 하나
돌아 선 길
돌아오면서
아픔을 잊고
다시금
반연의 길을 가야하는지
모두가
이 길 떠나면
저 언덕을 내려서는 것을
자꾸만 나그네 길을 묻는
전탑의 상륜부
저 대나무 숲에 묻혀 우는
남전사지의 풍경소리
다시 인연으로
이 땅에 설 수 있을까?
남전사 입구 마을인 남전촌
비교적 단아하게
개발구역을 정하여
새롭게 변화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찾는 날에는
이곳에 머물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