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진황도시 북재하 진시황 행궁 유적

相民 윤봉택 2007. 7. 21. 16:19

2007. 07. 14.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북재하 금산 주변에 있는 진시황제의 행궁 유적(北載河 秦行宮遺址)입니다.

 

그러나 진황도시 주변에는 이곳 말고도 가까운 요녕성 갈석산에도 행궁터가 있는 등

진시황과 관련한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7월 14일 오후 시간에,

진황도시의 축제 참관을 마치고 나서

 

진황도시의 서복협회장과 북경 중국서복협회장님의 안내를 받아

기원전 215년 경 진시황제가 이곳을 순력할 때 지은 행궁터를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실은 이곳은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비공개구역입니다.

 

1986년 부터 1991년까지 1차 발굴이 이뤄졌으며,

이곳에서 많은 진(秦)한(漢)대의 유물이 출토되어, 임시로 마련된 전시관에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하여 진황도시의 담당 주임으로 부터 촬영 허가를 받아 촬영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 분야에 연구하시는 분들의 도움이 될까하여 그곳 안내문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곳 주임께서는 발굴조사보고서를 시정부에 보고하여 보내주신다 하였고

관련 협회에서도 협조하여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이곳의 주요 유물들을 우리 서귀포시 서복전시관에 대여 전시할 수 있도록

중국 문물국과 적극 협의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재기(빨리) 그날이 오기를 소원해봅니다.

 

 

23470

 

 

 이곳이 북대하 진황행궁터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행궁 유적 안내판 

 

 북재하의 행궁터 발굴지입니다.

 

주변에는 와편 등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곳  총괄 책임자인 李東收 주임 선생입니다.

비록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분야의 문화재를 연구하는 동지를 만났다고 매우 방가하면서

문자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가 서복 관련 학술발표가 있을 때에는 한국에 초청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을 형님처럼 다정하게 느껴지는 분이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북재하 진시황 행궁터 입구 정문이며, 우측은 관리사무소입니다.

 

이곳에서 발굴된 주요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입니다.

관람하고, 사진으로 담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주신

진황도시 인민정부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행궁 유적은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후,

불로초를 찾아 215년에 이곳을 방문하면서 세운 행궁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갈석은

진황도와 요녕성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서 이곳에도 진황의 유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로서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동북공정이 사실이 아님을 알려주는 유일한 곳

바로 갈석산이 있는 지역이 오래전 낙랑군이 있던 곳입니다.

중국이 고조선을 진압한 후 세웠다는 바로 그 낙랑군입니다.

그 낙랑군이 평양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갈석산 유적은 15일 찾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시황이 전국 통일 후, 4번을 순력했는데 그 정표입니다.

 

 

북재하의 진황유적 축소모형입니다.

 

이 유물과 뒤에 보이는 도용은 서안의 병마용갱의 도용 모형이며

金玉衣는 정주시에서 출토된 한나라 시대의 것으로 복제품입니다. 

 

 

유물 사진 다음으로 전시실 안내문을 담았습니다. 

수척통와垂脊筒瓦입니다.

 

통와는 숫기와를 말합니다. 규격: 66×90×32-38×18cm.

 

 

쌍용문반와당 雙龍紋半瓦當

"당:은 막새를 나타냅니다. 숫막새입니다.

 

용의 무늬는 황제가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자금성의 모든 막새에도 용문이 세겨져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산운삼각문반와당 山云三角紋半瓦當 산수에 삼각무늬가 있는 숫막새기와입니다.

 

 

전국시대의 척와 脊瓦

아랫 부분에 놓는 암기와입니다. 

 

 

쌍용도철문반와당 雙龍饕餮紋半瓦當

쌍용이 그려진 숫막새기와입니다. 

 

진황시대의 용의 발가락은 세개입니다.

 

당송시대에 들어 오면서 4개로 변합니다.

이쯤되면 용의 발가락과 모습이 진화되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헌데 지금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용의 발가락이 다섯개가 되었습니다.

 

 

공심전 空心砖

계단석으로 놓았던 속이 빈 벽돌입니다.

 

속이 빈 것을 계단으로 놓은 까닭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가 계단을 밟으면 소리가 나기 때문에 침입을 사전에 방지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헌데 우리나라에서는

궁궐에 보면 모두가 단단한 계단석과 판석으로 되어 있어서 여러 사람이 이동하여도 소리가 나지 않은 게

특징입니다.

그러면 은밀하게 내분이 자주 일어 날 수가 있습니다만, 남을 믿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외부에 자갈을 깔아 놓아 조그만 밟아도 바스락 거리게 하여 즉시 알 수 있게한 게 특징입니다.

역시 의심이 많은가 봅니다.

 

 

 

 

한 대 공심전 漢代空心砖

이 공심전은 한나라 시대의 공심전입니다.

 

진나라의 것에 비하여 무늬가 규칙적으로 많은게 특징입니다.

 

 

 

 

 

 

 

 

 

 

   

  

 

전설이 아닌, 사실적인 이야기입니다.

강씨 여성이 만리장성 축조하는데 공역나간 남편을 찾아 산해관에 왔다가 남편이 돌아갔음을 알고

남편의 길을 따라 갔다는 슬픈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정권 井圈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둘렀던 것입니다.

 

 

 

 

 수관도 水管道

 수도관입니다.

 

 

 판와 板瓦

암기와입니다.

 

 

 

 

절복분 折腹盆

항아리입니다.

 

 

 

 

 

 

통와 筒瓦

숫기와입니다.

 

 

숫기와 

 

 

 능형문소전 菱型紋小塼

작은 전석으로서 계단 앞이나 평지에 깔았던 벽돌입니다.

 

   

고부조기용문대와당 高浮雕夔龍紋大瓦當

 

매우 큰 숫막새기와였습니다.

부조 문양도 특이하구요

 

 

 척와 脊瓦의 부분 문양

 전국시대의 척와 脊瓦

암기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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