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갈석궁 유적

相民 윤봉택 2007. 7. 25. 23:45

2007. 7. 15.

 

요녕성 갈석궁 유적입니다.

 

지난 7월 15일

 

 중국 동해안의 산해관과 하북성 건너 경계를 이루고 있는 요녕성 서쪽 발해(渤海)와 접한

수중현(綬中縣) 바닷가에 있는 진시황의 행궁인 갈석궁(碣石宮) 유적을 들리고 나서

산해관을 보고 북경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곳 유적은 요녕성에서 관리하고 있어 사진 촬영을 허용하지 않아 그냥 반사적으로

방향만 보고 담았기 때문에 상태가 별로입니다.

 

 이곳 연구 책임자인 양진정梁振晶 부연구원 선생으로부터 안내를 받아 살펴볼 수는

있었습니다만, 참으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이 갈석궁은

중국 요녕성 서쪽 발해(渤海)와 접한 수중현(綬中縣) 바닷가 주변에 있는

갈석궁(碣石宮) 유지(遺址)로서, 진시황이 재위 32년(B.C. 215) 이곳에 왔다가

쌓았다는 행궁입니다.

 

 또한 갈석궁 근처의 바닷가에 맹강녀(孟姜女) 동상이 있는데, 230여 년 전에 이곳을

지났던 박지원은 ‘열하일기’강녀묘기(姜女廟記)에서 “강녀가 만리장성 축조에 끌려간

남편을 찾아 이곳까지 왔다가 통곡 끝에 돌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갈석산은 바로 하북성 창려현(昌黎縣)에 있는데, 하북성과 요녕성의 경계 지점입니다.

아울러 갈석산은 진시황과 진의 2세 황제 호해(胡亥), 한(漢) 무제(武帝), 위(魏)의 조조(曹操),

당 태종 등 아홉 명의 황제가 올랐다는 유명한 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갈석산은 우리나라 고조선의 수도였던 곳이라는 학설이 강하게 주장되는 곳입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북한 지역을 중국사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고조선 수도에 한(漢)나라의 식민 통치기관인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했는데, 그 자리가

현재의 평양 일대라는 것에서 비롯합니다.

 

 지금 국사교과서도 고구려가 평양에 있던 낙랑군을 몰아낸 후 남쪽으로 진출했다는

식으로 ‘낙랑군=평양’을 전제로 서술하고 있는데,

‘낙랑군=평양’ 설(說)은 1913년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今西龍)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서,

해방 후에 이병도(李丙燾) 교수가 ‘신수(新修)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1972)’ 같은 책에서

계속 이를 지지하면서 현재까지도 정설(定說)로 알려져 왔습니다만,

 

 그러나 중국의 고대 사료인 ‘사기(史記)’의 주석서인 집해(集解)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는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내용이 있는바,

 

 갈석산이 있는 창려현이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 지역이자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뜻으로,

수성현의 갈석산이 바로 낙랑군의 있던 위치가 아닌가하는 학설이 점차 우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담아 보려고 했는데 그러하지를 못해 많이 서운했습니다.

 

 

23626

 

 

 

 

갈석궁 유적지 입구입니다.

이곳 또한 진시황제의 행궁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물은 진대와 한대의 것이 발굴되고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사기에는 낙랑군 수성현 갈석산이라 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고조선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였던 그 낙랑군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곳은 유적지로 개방되어 있는 곳입니다. 

 

 

임시로 마련된 전시실 내 발굴지 모형입니다. 

 

 

요녕성 문물고고연구소 강여석공작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재라고 표현하는데 중국이나 북한에서는 문화재를 문물文物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유물을 촬영하지 못하도록 하여서

방향만 보고 마구 담았기 때문에 그림이 별로입니다.

 

반와당 半瓦當

 

숫막새입니다. 

북재하 진황행궁유적 전시실에서는 볼 수 없엇던 것입니다.

 

반와당

숫막새입니다. 

 

 

 

 

기용대와당 夔龍大瓦當

숫막새입니다. 규격 직경 52cm 높이 46cm

 

판와 板瓦

암기와입니다. 

 

 

권운점패문대원와당 卷云貼貝紋大圓瓦當

숫막새입니다.

 

명문 천추만대 와당  銘文 千秋万岁 瓦當

숫막새입니다.

 

 

 

수도관입니다.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용도로도 사용했을 거라 하였습니다. 

 

 

 

 

한나라 때의 공심전입니다.

계단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절복분 折腹盆

 

 

 

발굴지 내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물 보관소입니다. 

 

유물보관소 외부에 쌓아 놓은 와편 

 

 

 발굴지 내 주변 원경

요녕성 갈설궁 유물 발굴을 전담하고 있는

강여석姜女石공작점 책임자인 양진정梁振晶 부연구원입니다.

 

심양시에 계시다가 우리가 방문한다고 하자

아침 일찍 이곳에 도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분야 문화재 업무를 담당하기에

공감할 수가 있었습니다.

 

보고서 한부를 받아 보고싶다고하자 즉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내주시도록 부탁드려볼까 합니다.

 

발굴지 내에 임시로 쌓아 둔

와편의 일부 문양을 담아 보았습니다. 

 

 

 

 

 

 

 

 

 발굴지 입니다.

주면은 온통 옥수수 밭뿐입니다.

 

북경까지 300여km를 달려도 옥수수 밭 뿐.......

발해를 사이에 두고

어느 못다 이룬 강씨 부인의 넋이

돌이되어  계시는데

 

진시황 행궁 유적을 발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놓았습니다.

당시에 농민들이 불을 놓아 행궁을 불태웠기 때문에

타다 남은 기둥들이 ....

 

 

 

 

공심전 계단 아래로 놓여진 전석도 보이고 

 

 

유물지 내 작은 둔덕에 세워진 흉상 하나 

 

유물지에서 바라본 해안변 

 

 

 저 건너 보이는 곳이

산해관이 시작되는 위치입니다.

 

작은 경계 하나가

요녕성과 하북성의 갈림길이 됩니다.

 

아마 진시황이 처음 이곳을 순력하고

조조가 순력할 때에도

저 꽃은 오늘처럼 

피어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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