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01. 10.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성
삼랑성
단군왕검의 아드님들께서 쌓으셨으니
당연히 가장 오랜된 성이라 말할 수가 있겠지요
이 성은 강화도에 있습니다.
단군왕검의 세분 아드님께서 쌓으셨다하여 삼랑성이라 불려지는 성
단군왕검에게는 네분(단군부루-단군부우-단군부소-단군부여)의 아드님이 계셨는 데
그 세 분이 어느 분이셨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지난 1월 10일
1월 중에 마니산 참성단이 공개된다고 하여
숨가쁘게 강화섬으로 향하였습니다.
10일, 강화섬에 닻을 내려
어둠에 잠기는 삼랑성, 전등사, 선원사고지, 고려 가궐지 등을
11일에는 참성단을 순례한 후, 다시 섬으로 돌아 올 수가 있었습니다.
성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의 지리지에 의하면 전등산(傳燈山)을 삼랑성(三郞城)이라고 부르며,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았다고 전해 온다고 하였습니다.
정족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의 축성에 관하여는
강화에서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단군 세 아드님께서 쌓으신게 분명합니다.
삼랑성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는 데,
동문입니다.
이 문을 지나면, 고종 3년(1866) 병인년 때 프랑스군의 침공을 용감하게 막아 낸
양헌수의 승전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문 입구 상부는 벽돌로 홍예를 만들어
견고하게 하였고,
위로는 성도를 두어 교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문 입구 내부,
이 문을 건너면
전등사에 닿을 수가 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들은 남문과 동문으로 침공하려 했었으나,
우리 군에 의하여 퇴각하였습니다.
그 때, 강화도 소장되었던 많은 자료들을 프랑스군들이 침탈하여 가고서는
시방도 되돌릴 줄을 모르는 후안무치 왜국이 프랑스가 아닌가 합니다.
성벽은 할석으로 첨첨하게 쌓아
협축으로 접담하여
견고하게 닿았습니다.
단군왕검께서 세 아들에게
성을 쌓으라 명을 하였고
그 세아들은 힘을 모아 마니산정에 토성을 쌓았나 봅니다.
당초에는 토성이었으나,
후대에 와서는 석축으로 쌓아 여장-총안 등을 설치하였습니다.
선조 39년(1606)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왕조실록을 보존하다가,
현종 원년(1660)에는 삼랑성 내에 정족산사고로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삼랑성의 중심 종해루입니다.
영조 15년(1739)에 삼랑성을 중수를 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여
종해루(宗海樓)라 하였고, 1764년 다시 성을 중수하였으며,
성안에는 훈련도감과 금위영·어영청 소속의 창고가 마련되어 있기도 했었습니다.
종해루 현판,
1976년 복원하면서 다시 세웠습니다.
종해(宗海)는 '세상의 모든 강물은 바다를 우두머리로 여겨 흘러든다.'라는 뜻으로서
이 삼랑성이 우리나라 서해를 지키는 보루라는 의미입니다.
서경-서전의 우공편에 나옵니다.(서경-우공- 강한조종우해/江漢朝宗于海/장강과 한수가 바다로 흘러가니)
종해루 동쪽에서 바라보이는 삼랑성 남문입니다.
남문에서 삼랑성 동향
성도를 따라 걷다보면
그날에, 이 길을 순시하며 숱한 외적의 침입을 막아 내었던
이름없는 무명장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
이제 성 내부에는
그 시절, 정족산사고도, 고려의 가궐터도,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도
마니산정을 넘어가는 한 낱 바람일 뿐
삼랑성의 잣벽에 남겨진
홑씨의 무게일 뿐
이제는 너도 아니도, 내도 아니었음을...
솔향에 흔들리는
전등사 대웅전의 풍경소리로만 사바 세계를 지날 뿐...
모두가 잠시 돌아서면
문득 저 세상임을 믿기에
수목장에 기대인 바람으로나, 먼 길 떠나는 저 님들의 안부를 전할 뿐....
이제는 돌아가
강화벌로 돌아 눕는 바람이라 하여도
천년을 넘겨 선
그 대 반연의 얽혀 맺음으로
먼 길 돌아 예에 서 있음, 느낄 수가 있는 것을
그대가 바람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