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섬의 문화재

서귀진성

相民 윤봉택 2017. 6. 28. 13:59

2017. 06. 28.


서귀진성을 알면,

서귀포가 보인다.


     서귀포를 상징하는 서귀진성은

 

이것은 단순한 역사유적 기록이 아니라,

지금까지 확인된 문헌 가운데

서귀포西歸浦라고 기록된 최초의 문헌자료입니다.


"서귀진성"의 서귀포가 오늘날 서귀포의 원류인 것입니다.

때문에 "서귀포"를 상징하는 "서귀진성"을 떠난

서귀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서귀진은 서진노성(西鎭老星)이라고 하여

서귀진에서 새벽에 일어나 무병장수의 별 노인성(카노푸스)을 바라본다고 하여,

영주12경이 한 명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귀포西歸浦는 이미 당시 이전부터 선박이 출입하였던 것으로 보아,

문헌으로 살펴보자면

서귀포항의 개항은 1439년으로 하여야 할 것이며,

이로 살피면 2017년이 서귀포 개항 578년이 됩니다.

 

지금의 서귀진성 전신은 서귀포방호소(西歸浦防護所)입니다.

방호소는 육군이, 수전소는 해군이 주로 근무를 하였습니다.


  2011년 서귀진성 주변 항공 촬영 방어유적(삼매봉수-서귀진-보목연대)


  2011년 새섬과 새연교



 발굴 전 서귀진성









  관아 건물지 발굴조사


 발굴조사 현장 보고회


 저수조 집수정




 저수조 하부

 집수정으로 이어지는 수로


 집수정으로 이어지는 수로


 집수정으로 이어지는 수로


  집수저응로 이어지는 수로


 저수조(집수정)발굴 (정모시/정방폭포 상류에서 물을 끌어 와서 이곳에 물을 저장하여 사용하였다)


 출토된 명문기와


  2011년 서귀진성  항공사진


 2011년 서귀진성 항공사진


 1702년 탐라순력도 서귀조점


 이익태 목사의 서귀진성 


2000년

 

1439년 당시 서귀방호소에 근무하였던 군인은 마·보병 합계 124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성곽을 별도로 쌓은 것이 아니라, 그냥 집을 지어서 근무만 하였습니다.

 

서귀포를 상징하는 역사 유적 서귀진성은 3성(제주목성. 정의성. 대정성) 9진 가운데

규모는 가장 작지만, 가장 강한 방어 유적입니다.


이 서귀진성이 있어

서귀포를 지켜왔기 때문에

현재 서귀포시가 존재합니다.

세종실록에 보면

세종(世宗) (1439. 2. 4)서귀방호소(西歸防護所)에는 성곽이 없다고 하여

성을 쌓도록 허락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제주 도안무사 한승순(韓承舜)이 아뢰기를,

 

"의정부의 수교(受敎), ‘본주(本州)가 승평한 지 오래 되므로 수비 방어하는 계책에 혹 소루함이 있을까 하여 신에게 봉화(烽火)와 척후하고 망보는 것을 삼가게 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방수하라.’ 하였으며, 왜선의 정박할 요해지와 수비 방어하는 조건을 옛 늙은이에게 물어서 조처하고 아뢰라.’ 하였기에, 삼가 수비하고 방어하는 조건을 보고해 올립니다.

 

1. 도내에 군인이 주둔한 곳은 본주의 동쪽은 금녕(金寧조천관(朝天館)이요,

서쪽은 도근천(都近川애월(涯月명월(明月)이며,

대정현(大靜縣)은 서쪽은 차귀(遮歸)이요, 동쪽은 동해(東海)이며,

정의현(旌義縣)은 서쪽은 서귀포(西歸浦), 동쪽은 수산(水山)이온데

모두가 왜구가 배를 댈 수 있는 요해지오라, 이전에는 다 방어소를 두었습니다.

...... 중략 ......

차귀소(遮歸所)의 군인은 마·보병 합계 75명이고,

대정현의 성 지키는 세 곳의 군인은 합계 47명이고,

동해소(東海所)의 군인은 마·보병 합계 56명이며,

서귀소(西歸所)의 군인은 마·보병 합계 124명이고,

정의현의 성 지키는 세 곳의 군인은 마·보병 합계 483명이며,

수산소(水山所)의 군인은 마·보병 합계 175명인데,

모두 번을 나누어 방수(防戍)하옵니다.

 

세종실록 99, 세종 25110일 병인 3번째기사 1443년 명 정통(正統) 8

제주 안무사가 세 곳에 성을 쌓아 지키고 방어하기를 청하다

제주 안무사가 치계(馳啓)하기를,

"이제 병조(兵曹)의 이문(移文)에 따라 ...... 중략 ...... 정의·대정 두 현의 사이에 있는 서귀 방호소(西歸防護所)는 두 현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적선이 들어와 정박할 것도 또한 두렵사오니, 이 세 곳에 성을 쌓아 지키고 방어하도록 하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병조에 내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1581)에는

당시 성곽 규모가 돌로 쌓여 있으며,

둘레가 500, 높이 5척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후 1590년 이옥 목사 때 현재의 솔동산으로 옮겨왔습니다.

 

제주목사 이옥(李沃)

새로 마련한 현 서귀진성(西歸鎭城)은 둘레가 500(/233m)이고, 높이가 6(/2.8m)이고,

서문(西門)과 남문(南門) 2개소의 성문과 성내에는 우물이 1개소가 있는데,

성 아래로 물을 끌어 들여왔다고 하였으며,

이때에 마련한 진성(鎭城)이 현재의 서귀진성(西歸鎭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라순력도 서귀조점에 의하면,

서귀진성(西歸鎭城)은 동서(東西)가 남북(南北)보다 다소 긴 타원형(橢圓形)형태이며,

성곽의 주요시설로 동, 서에 마련된 2개소의 성문(城門)

성내 북측의 중앙에는 초가로 된 객사(客舍)가 위치해 있고,

동측에는 팔작(八作)의 기와(蓋瓦)지붕형태인 병고(兵庫)

그리고, 서쪽지역에 4개 동()의 초가(草家)건물(정면 3×측면 1)이 보입니다.

 

문루건물(門樓建物)은 성문(城門)의 통로(通路)의 중간에는

초가(草家)로 된 누문식(樓門式)의 문루(門樓)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서귀진성은 서귀동 713-12번지 일대에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북위 33°1433.62, 동경 126°3352.21에 해당하며

 해발고도는 24m 내외이며 해안에서는 0.30km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서귀진(西歸鎭)은 조선시대 제주의 대표적인 방어유적으로

3(三城) 9(九鎭)에 속하며 정의현(旌義縣) 관할이었습니다.

 

주변 역사유적으로는 도내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천지연 후기 구석기유적(생수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한라산 일대를 중심으로 국립목장을 설치할 때

그 담장으로 쌓았던"잣"(동홍동 중잣, 동홍동 하잣, 서홍동 하잣)

서쪽으로 서귀진(西歸鎭)에 소속되었던 삼매양봉수(三梅陽烽燧)가 있으며,

또한 동쪽으로는 서귀진 소속으로 서귀포시 보목동 보목연대(甫木烟臺)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귀진성과 삼매봉수 보목연대는 한 축을 이루는 방어유적입니다.

 

서귀진성은

선조22(1589)에 현재 서귀진에 축조된 이후,

1901(광무5)에 서귀진이 폐지될 때 까지 312년 동안 서귀포를 지켜 왔으며,

당시 건물들은 일제 억압기에는 관공서, 학교, 경찰서, 우체국 등 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4843사건이 발생하자

이곳의 성벽을 헐어 마을을 방어하는 축성용으로 사용하였고

이후에는 주거용 건축 용도와 "밧담"으로 무분별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이미 진성의 성벽 일부가 오래전부터 붕괴 또는 함몰되어

현 상태로 방치할 경우 멸실될 우려가 있어

1998~2000년 까지 지역주민 설명회를 가져

2000. 11. 1일 제주도지정 문화재 기념물 제55호 서귀진지(총 면적 7,670)로 지정하고나서,

토지매입, 발굴조사, 정비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때문에 서귀진성을 따로 떼어 놓고서 서귀포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 왕조실록 자료

 

서귀진성(西歸鎭城)은 초기에 서귀방호소(西歸防護所)라고 불려졌습니다. 서귀방호소(西歸防護所)의 첫 기록은 세종(世宗) 21(1439)에 제주도안무사(濟州都按撫使) 한승순(韓承舜)이 올린 기록에서 보인다. ‥‥ 본주(本州)‥‥우도(牛島)의 인근에 있는 수산(水山)과 죽도(竹島)의 인근에 있는 서귀방호소(西歸防護所)에는 모두 성곽이 없사온데, 만일 왜적이 밤을 타고 돌입해오면 군사가 의지할 곳이 없사와 응적하기에 형편이 어려우니, 형편을 요량하여 성을 쌓게 하시고 적변을 대응하게 하소서.라 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후 세종(世宗)25(1443)에 제주안무사(濟州按撫使)의 치계(馳啓)에서도 ‥‥정의·대정 두 현()의 사이에 있는 서귀방호소(西歸防護所)는 두 현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적선(賊船)이 들어와 정박할 것도 또한 두렵사오니, 이 세 곳에 성을 쌓아 지키고 방어하도록 하기를 청하옵니다.”하여 병조에 내렸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후 예종(睿宗) 1(1469)에도본주 동쪽의 조천관(朝天館), 금녕(金寧) 서쪽의 도근천(都近川애월(涯月명월(明月)과 대정현(大靜縣)의 차귀(遮歸동해(東海)와 정의현(旌義縣)의 서귀(西歸수산(水山) 8처는 요해(要害)의 땅이므로, 모두 다 방호소(防護所)를 설치하고, ‥‥병조(兵曹)에 내려 시행하게 하소서.”하여 따랐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성종(成宗) 12(1581)에 구체적인 성곽규모가 보인다.“서귀방호소성(西歸防護所城)은 돌로 쌓았으며, 성 둘레가 500(), 높이가 5()이다라 하였습니다.

 

이후 17세기 전반의 기록인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에서 서귀방호소는 홍로천(洪爐川)에 있었다고 한 내용으로 보아, 서귀진성(西歸鎭城)은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옥(李沃) (1590) 현재의 서귀진성(西歸鎭城)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료정리 : 윤봉택(전 도문화재전문위원)

 

자료동영상 제주mbc tv 스토리공감에서 방영된 https://youtu.be/GHm34JWOk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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