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따라서

법흥사

相民 윤봉택 2013. 8. 23. 16:16

2013. 07. 29.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법흥사입니다.

휴가 2일 째를 맞아

구산선문의 하나인 법흥사 징효대사보인탑비를 참배하였습니다.

 

지금은 법흥사라고 합니다만

1902년 이전 까지는 흥령사라고 하였습니다.

 

보물 612호로 지정된 흥령사 징효대사보인탑비(興寧寺澄曉大寺寶印塔碑)

고려 혜종 원년(943)에 건립된

신라말 고려초기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탑비입니다. 

 

법흥사(法興寺)는 남북국시대 말 자장율사께서 창건하셨는데

처음 명칭은 흥녕사(興寧寺)였습니다.

신라 진성여왕 4(891)에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고려조 혜종 원년(944)에 중건하였으나, 다시 소실되었고

이와같이 흥망성쇄를 거듭하며 폐사지로 유지되다가

1902년 새롭게 변신하면서 법흥사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법흥사가 구산선문의 하나가 된 것은

신라조 철감도윤 선사에 의해 서입니다.

영월 사자산문의 개산조 철감도윤(798~868)선사께서는

825년에 당나라에 입국하여서는 마조 문하인 남전 보원의 법을 전해 받고,

847년에 귀국하여서는 쌍봉사에서 선풍을 진작하였고,

그의 전법제자인 절중 징효(826~900)는 영월 땅 사자산 흥녕사(興寧寺)에 머물며

선문을 높이 열어 우리나라 선풍을 고양시킨 곳이 바로 이곳 법흥사입니다.

 

 철감 도윤스님은 그의 나이 28세 때 당나라로 구법길을 떠났습니다.

남전 회상에 머무른 철감을 보고 하루는

남전화상이 나의 가르침의 핵심은 해동(한국)으로 돌아가리라

(오종법인 귀동국의 吾宗法印 歸東國矣)”라고 대중 앞에서 설파하실 정도로 철감을 아꼈습니다.

 

선에 대한 잠깐 사족입니다.

 

 은 흔히 우리에게는 참선參禪으로 알려져 있으며, 굳이 표현을 하자면 앉아 결가부좌하여

화두를 갖고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선은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 하나 하나에

 담겨 있으며, 화두를 통해 수행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듯싶습니다.

 

 이러한 선은 인도에서 시작되어 달마대사 때 비로소 중국(양무제 때)으로 전해 졌으며,

우리나라에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에 아홉 스님에 의해 구산선문이 열리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참선 보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류를 중심으로 번역하고 그 경전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하였었습니다.

 

 그리고 참선이 대승선인 선종禪宗으로 확립되기는 6조대사인 혜능스님 때에 와서 선종으로서의

 선종가풍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진덕여왕(647~654) 때 법랑法朗스님에 의해 중국 선종의 제4조인 도신스님의

법을 전해 받았습니다. 또한 신행神行스님에 의해 북종선이 전래되기는 하였으나 미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선종이 전래되어 선풍이 고양된 것은 도의道義선사부터입니다.

도의선사는 784(선덕왕 5) 당나라의 강서성 홍주의 개원사 마조 도일의 문하인

서당 지장(735~814)에게는 법을, 백장 회해로부터 법요을 전해 받고, 821년에 귀국하여서는

법을 전하려 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은 교리만 숭상할 뿐 무위법을 믿지 않아,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면서 40년 동안 수행하시다가 제자인 염거에게 법을 전한 뒤 입적하였으며,

염거는 체징에게 전하였습니다.

 

 후에 체징(804~880)은 당에 입국하여 고승을 찾았으나, 더 구할 법이 없음을 알고 그대로 귀국하여

 

 장흥 가지산에 보림사를 창건하고 선문을 개산하였으며,

 

 남원 실상산문의 실상사 개산은 홍척洪陟이 도의선사와 마찬가지로 서당 지장에게 법을 받아

826년에 귀국하여 지리산에 실상사를 창건 개산함으로서 도의보다는 5년 늦게 귀국하였으나,

산문은 먼저 열었고,

고성 동리산문의 개산조인 혜철慧澈 814년에 당으로 가서 서당 지장의 법을 받고,

839년에 귀국하여 동리산 태안사에서 동리산문을 열었는데, 신라의 고승 도선국사는

바로 혜철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문경 희양산문의 봉암사 산문은 유일하게 당나라에 가서 법을 구하지 않았으나,

신라 진덕여왕(647~654) 때 당나라로 가서 중국 선종의 제4조인 도신스님의 법을 전해 받은

 법랑法朗스님의 전법제자인 신행神行스님(후에 신수문하에서 북종선도 전해 받음)

그의 전법제자 준범遵範에서 다시 혜은慧隱으로 혜은은 다시 진감 혜조에게 그 법맥이 이어졌고,

 

 진감 혜조는 도헌 지선(824~882)에게 전법하였으므로 중국 선종의 제4조인 도신의 법맥을 이은

 것입니다. 그리고 도헌에게 전법한 진감 혜조(774~850)는 당나라에 범패를 배운 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한 스님이기도 합니다.

 

 창원 봉림산문은 현욱 원감(787~868)이 당나라에 입국하여 마조문하인 장경 회휘에게

법을 전해 받고 837년에 귀국하였으며, 그의 전법제자인 심희 진경(854~923)(897~912)

봉림사에 머물면서 봉림산문을 열었고,

 

 보령 성주산문은 무염 대낭혜(801~888)821년 당나라에 입국하여 마조 문하인

마곡 보철의 법을 전해 받고 845년에 귀국하여 성주사에 머물면서 성주산문을 열었으며,

 

 강릉 사굴산문은 범일 연휘(810~889)831년 당나라에 입국한 후 마조 문하인

염관 제안의 법을 전해 받고 847년에 귀국하여서는 40여 년 동안 굴산사에 머물면서

 사굴산문을 열었습니다.

 

 영월 사자산문은 철감 도윤(798~868)825)에 당나라에 입국하여서는 마조 문하인

남전 보원의 법을 전해 받고, 847년에 귀국하여서는 쌍봉사에서 선풍을 진작하였고,

의 전법제자인 절중 징효(826~900)는 영월땅 사자산 흥녕사(興寧寺)에 머물며 선문을 진작시켰으며,

 

 해주 수미산문은 이엄 진철(866~932)896년 당나라에 들어가서 조동종 계통인

동산 양개의 제자인 운거 도응(6조 혜능 청원 행사 석두 희천 약산 유엄 운암 담성

동산 양개 운거 도응에게 법을 전해 받고, 911년에 귀국하였는데,

고려 태조는 수미산 광조사를 지어 스님을 머물게 함으로서 개산되었는데, 유일하게

북한지역에 있습니다.

 

한국 선종에 법을 전한 동토 초조에서 9조까지의 법맥도입니다.

 

 초조 : 달마(순례 - 계명사)

 2: 혜가

 3: 승찬(순례 - 3조사)

 4: 도신(순례 - 4조사) 법랑 신행 준범 혜은 진감 도헌(문경 희양산문, 봉암사)

 5: 홍인(순례 - 5조사)

 6: 혜능(영가 · 청원 · 남악 · 남양 · 하택 등)

     

 7: 남악 회양(순례 - 남대사

        청원 행사 석두 약산 운암 동산 운거 도응이엄 진철(수미산문, 해주 광조사)

 8: 마조 도일 (순례 -우민사)

 9: 서당 지장 (고성 동리산문. 남원 실상산문. 장흥 가지산문)

          백장 회해

          염관 제안 범일 여휘(강릉 사굴산문, 굴산사)

          남전 보원 철감 도윤(영월 사자산문, 법흥사)

          장경 회휘 현욱 원감(창원 봉림산문, 봉림사)

          마곡 보철 무염 대낭혜(보령 성주산문, 성주사)

 

 이처럼 한국 선종은, 우리나라에서 출가는 하였으나 당나라에 들어가 정법을 전해 받고,

귀국하여서는 산문을 열어 선풍을 진작함으로서, 중국과는 달리 남북선을 구분하거나

분파하지 않고, 단일 종으로 법맥이 유지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6조 혜능 남악 회향 마조 도일 남전 보원(748~834)

 

 남전 보원스님의 전법제자 중에는 저 유명한 無字, 喫茶去, 平常心是道   화두의 주인공

조주 종심(778~897)선사가 있었는데, 남전 보원스님은 죄 없는 고양이를 살생(?)한 화두

 “남전참묘의 공안을 창출하신 큰스님이십니다.

 

 

 

 

 

사자산 법흥사 산문인 일주문입니다.

다른 일반 사찰과는 달리 주초를 코끼리와 귀부상으로 마감하면서 여섯개의 연꽃 봉오리로 장엄하였습니다.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자산문을 진흥 시키신 징효국사의 탑비입니다.

 보물 612호로 지정된 흥령사 징효대사보인탑비(興寧寺澄曉大寺寶印塔碑)

 고려 혜종 원년(943)에 건립된 ,신라말 고려초기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탑비입니다

천년의 시공을 이으시고, 사자산으로 나려 나려 시방 이곳으로 닻을 풀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다시 돌아서면

 떠나온 그 시간의 편린들을 하나 하나 다시 모울 수가 있을까요, 아니면 ...

 다가서면 다가서는 만큼 멀어지는

 나의 존재는

 달빛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물인 것을 

 어이하리

 저 거북은 동해 바다를 건너 사자산 자락까지 다가 오셨는데

 그날에도 분명 그러하였으리니

 흥녕에서 다시 법흥이 되기 까지,또  다시 이어지는 저 쇄락을 어이할꼬

 내 삶의 석공은 저 비신(碑身) 빚기를 몇 번이셨는지

 시방도 정 다듬소리는 풍경으로 나려 나려 오시는걸

 하대석(下臺石)은 그대로 지심(地心)을 낮추며, 부대석(趺臺石)을 밀어 올리고

 부대(趺臺)를 안심입명처로 버텨 오심이여

 귀부(龜趺)는 또 다른 하늘을 기다려

 동해바다 건너 오신

 내마음의 눈먼 거북이여

 여의주가 없으면 어떠리, 그대 있음이 내겐 미쁨인 것을

 통석으로 머무는 비좌 우로

 이수(螭首)를 이고 오신 저 비신(碑身)의 아름다움을 만나 보소

 살피나니

 비좌(碑座)의 미소로 솟아 오르는 저 운문(雲紋)은

 예가 바로 구품연대가 아니시던가

 돌아보면 이처럼 나의 모습인걸

 무얼 찾아 예 까지 수고로움을 더하시는지

 부질 없어라

 내 삶의 미소여

 교룡은 두전(頭篆)으로 보주를 안아 오셨는데

 이를 어찌하리

 내 모든 것 두고 와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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