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소피아의 목욕탕 유적

相民 윤봉택 2024. 3. 3. 18:13

2014. 2. 16.

 

소피아의 성 게오르기 교회 뒷편에 있는

로마시대 세르디카(Serdica) 유적 중 하나인

소피아 목욕탕 추정유적입니다.

 

2014. 2. 16(일)

오전에

릴라수도원을 답사한 다음

소피아로 돌아와 점심을 하고 나서

시내 중심에 있는

세르디카 유적 주변의

바나바시 모스크, 세르디카 유적, 지하교회, 성 게오르기교회를 답사하고 나서

바로 성 게오르기교회 후면에 연결된

로마시대의 세르디카 유적 중,

목욕탕 유적을 답사하였습니다.

 

소피아Sophia, Sofia

발칸반도의 꽃,

 

장미의 나라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는

도나우강으로 흘러 한 지류를 이루는

이스쿠르강의 지류가 시내를 가로 지르는

녹색의 중세도시이자,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고도 중 하나입니다.

 

기원 전 7세기 이후부터는

트라키아인들에 의해 소국가로 발전을 하였고

고대 로마시절에는 세르디카라는 이름으로

기원전 1세기 이전에는 켈트족의 한 부족인 세르디카족들이 거주했다하여

세르디카로 도시가 이뤄진 이곳,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 황제 시절

크게 번성했던 세르디카는

서기 447년 훈족의 침략으로 페허가 되었으나,

6세기 경에 비잔틴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483-565)에

의해 크게 번영을 누립니다.

 

서기 809년 제1불가리아제국

1382년부터 1877년 까지 5백년 가까운 오스만제국의 지배

러시아 터기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서 독립된 세르디카는

1878년 러시아로부터 이양받아

세르디카에서 소피아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미

제2불가리아제국 쉬쉬만(재위 1371-1395)시절에

소피아라고 하였던 것으로 보아

이 때부터 세르디카 또는 소피아를 혼용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세르디카 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유적인 목욕탕으로 추정되는 유구입니다. 

 

이 로마유적은 로마건축기법이 가장 황금기에 축조된 것으로

로마건축의 축소판입니다.

 

 

 전면에 보이는 건물이 성 게오르게교회, 그 앞의 건물이 호텔입니다.

 그 후면에는 이처럼 로마시대의 유적이 있구요

 이 유적들은 주변에 현대식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발굴되었다고 하네요.

 

A 바나바시모스크사원.

 B 세르디카 유적. 

C 성 페트카 사마르드지스카 교회(Church Sveta Petka Samardzhiyska Church)

 D 성 게오르기교회(Sveti Georgi).  E 목욕탕 유적.

 F 바나바시모스트거리(골동품) G 성 소피아성당. H 알렉산더네프스키교회(Alexandar Nevski) 

 

 

 바로 이 성 게오르기교회 후면에 로마시대의  목욕탕 유적이 있습니다.

 

 

 로마건축 기법이 곳곳에 스며있는

 하여 공간 구조는 매우 세심하게 되어 있고,  당시에 지진이 자주 발생하여서 그런지

 벽과 벽 사이의 너비 또한 30~70cm 이상 축조하여  매우 견고하게 시설되었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주변에 현대건축물 지하에도 온통 로마시대의 세르디카 유적들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소피아의 중심 전체가 지하에는 로마유적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유구 규모가 대단하였습니다.  

 

 

 

 

 가운데에는 회랑이었던 듯,

 여기 저기 흩어진 석주들만 그날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유구 한켠에는 이와 같이

 별도의 석축을 쌓아 19세기 부터 근현대건축물을 시공하였습니다.

 

 

 성 게오르기교회 후면에는

 아치형 공간을 만들어 교회와 관련된 성직자들을 추모하고 있고,

 

 

맞은 편에는 지하 유적을 무시하여 근현대건축(대통령궁)을 축조하였고,

 

 

 저는 이곳 유적들을 답사하면서 주로 살핀 것은  건조물 축조 방식 중 주로 석축 방식입니다.

 로마시대에 개발된 화산재와 자갈, 모래, 석회를 이용하여 만든 시멘트 반죽으로 한 벽돌쌓기와

 벽돌 등을 제작한 것을 콘크리트기법을 이용한 축조방식이었습니다.

 지난 1천5백년의 세월을 어떻게 견디어 왔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하여 허물어진 곳만 살폈습니다.

 

 당시에도 건물 용도에 따라 벽면을 자연석과 전석을 혼용하거나 아니면 따로 쌓아

 내부 공간의 미적 활용도를 높였나 봅니다.

 

 

 내부 바닥에는 다듬어진 판석을 깔았구요, 회랑 부분에는 자연석으로된 판석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원통형은 우물이었는데요.

 이로 보아 아마 이곳은 주방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곳 넓은 공간에는 가공한 붉은 판석을 깔았고,

 한켠에는 원통형을 잡석 다짐으로 축조하였는데. 용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유적 가운데 가장 넒은 공간입니다.

 석주가 있고, 원통형으로 축조된 구조물이 있고하여, 당시 연회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공간은 주변보다 조금 낮게 시설하였지만,

 가운데에는 가공한 석재로 벽을 쌓아, 작은 소형 출입 공간을 만들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가운데 공간에 가공한 석재를 쌓아 벽을 만들었고,

 그 가운데에 문확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공간과 공간을 구분하는 출입문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문확돌 후면으로 이렇게 가공한 큰 돌을 이용하여 벽을 만든 것으로 보아

 별도의 욕실이 아니면, 휴게공간이 아닐까라는 느낌도 드네요.

 

 

  벽돌로 축조된 내부 중, 일부 허물어진 부분입니다.

 세르디카유적에서 볼 수 있는 화산재, 석회와 혼용한 시멘트 반죽을 이용해 벽돌을 정교하면서도 견고하게 쌓았습니다.

 

 

  벽돌로 축조된 내부 중, 일부 허물어진 부분입니다.

  이곳의 축조 방식은 벽돌을 부정형으로 놓으면서 축조하였습니다.

 

 

벽돌로 축조된 내부 중, 일부 허물어진 부분입니다.

이곳 축조는 정교하게 벽돌을 한겹 쌓고 시멘트 반죽으로 다진 다음 다시 한겹씩 쌓았습니다.

 

 

 교회 바로 후면의 유구입니다.

 바닥은 가공한 판석을 깔았고, 다시 그 위로 넓은 방형 벽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한 점으로 보아

 이 유적의 성격에 맞는 시설물이 있었던 공간이 아닌가 합니다. 

 

 

 시설물 유적을 넓게 살펴 보면, 당시의 배치 구조를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유적으로 스며드는 우수를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주변에 근현대 건축물을 신축하면서 설치한 지하 관로입니다. 

 

 

당시 로마시대 유적 대부분이 그러하듯, 붉은 벽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견고하게 쌓았음이 특징이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현지에 이러한 유구에 대해 충분하게 설명하여 주시는 해설사들이 아니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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